상대의 호감을 사고 싶다면

2017-03-15     김금옥
 올해 봄 신설학교에 발령을 받아 부임했다. 신설학교다 보니 교명을 부착하는 일에서부터 급식소 숟가락까지 새로 정해야 할 것이 많았다. 어제는 학교의 상징이 될 교목을 정하기 위해 교정에 식재된 수종을 점검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오래간만에 전화를 걸어온 친구는 안부를 묻고 근황을 전하더니, 어느새 샛길로 빠져 한 편의 야사를 들려줬다. 대원군의 권세가 아주 높을 때, 한 선비가 찾아왔다. 대원군 앞에 가서 선비가 큰절을 올렸지만 대원군은 반응 없이 앉아만 있었다. 당황하고 난감해진 선비는 자신의 절을 보지 못한 줄 알고 한 번 더하게 됐다. 그러자 대원군이 벼락같이 화를 내며 호통을 쳤다. “네 이놈, 어디에다가 절을 두 번 하느냐. 내가 죽었더란 말이냐.” 그러자 선비가 대답했다. “소인이 감히 어찌 그리하겠습니까. 처음 드리는 절은 찾아뵀기에 드리는 문안 인사였고, 두 번째 드리는 절은 물러간다는 절이었사옵니다.” 선비의 재치에 대원군은 껄껄 웃으면서 벼슬길을 열어줬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한 말의 비사를 기록한 <매천야록>에 들어 있다고 한다. 살다 보면 선비처럼 인사를 해도 상대방이 본체만체하는 경우와 맞닥뜨릴 때가 있다. 기억이나 시력이 좋지 않아 못해서인 경우도 있지만, 대원군처럼 의도적으로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대개 어떻게 반응할까. 상대에게 무시를 당했다는 느낌을 받을 때 다시 인사하기는 쉽지 않다. 대개는 이쪽에서도 모르는 척하면서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 지나치게 십상이다.

 그런데 만약 선비처럼 한 번 더 인사를 하면 그때도 상대방이 무시를 계속할 수 있을까. 대원군도 뜨끔해져 “내가 죽었더란 말이냐”고 소리쳤듯이, 실제 선비의 두 번째 절의 속뜻은 “인사해도 반응이 없는 것은 죽은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생각이 여기에 도달하니,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하건 이쪽에서 인사를 제대로 하는 것이 정신적인 강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를 <매천야록>에 적어 놓은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니, 두 번 인사하면 상대방이 아무리 강자라도 설득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정에는 꽤나 다양한 나무들이 심겨져 있었다. 도서관 앞 햇살 좋은 곳에 ‘팽나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자리 잡은 키 큰 나무를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봤다. 속명이 셀티스(Celtis)였다. 고대 희랍어로 ‘열매가 맛있는 나무’란 의미로, 열매가 달콤해서 새들이 무척 좋아한다고 나와 있었다. 수령이 500년이 넘는다고 하니 오랜 세월 한 장소에서 살아가면서 많은 생명을 부양하는 셈이다. 이 교정에 머무는 아이들도 아름드리 팽나무처럼 건강하게 자라서, 한 동네를 거뜬하게 부양하고도 남을 인물들이 되길 기원해 본다. 지나가는 새들에게 쉬어갈 자리를 내어주고 큰 그늘을 드리워주는 팽나무처럼, 세상 사람들을 위해 쉴 그늘을 드리울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스며드는 것이었다.

 아직 환경정리가 되지 않아 썰렁한 복도로 들어서는데, 한 무리의 아이들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면서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갑자기 실내에 촉수 높은 전등이 켜진 듯 주변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기회가 오면 학생들에게 대원군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 상대의 호감을 사고 인간의 품위를 높이는 방법 중에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것이 진심이 담긴 인사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