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실제 역사에서 임나가 계속 등장하는 이유는 <일본서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가 고대 한국을 속국처럼 여기는 특이한 천황 중심 사관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말합니다.
<일본서기>는 신라에 편입된 가야 지역을 ‘임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야가 멸망한 뒤에도 임나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 세금을 바칩니다. 임나 사신은 대부분 신라 사신과 함께 일본에 옵니다. 그런데 이 임나 사신을 보면 신라의 6부 이름을 쓰고 있는(탁부, 습부 등) 신라 왕경인입니다.
신라에서 왜국과의 교섭에 금관가야 출신 또는 그 후손들을 임나사신이란 이름으로 함께 일본에 파견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신라 사신인데 임나 사신으로 신라와 일본이 서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532년 금관국이 신라에 복속되고 562년 대가야가 멸망한 뒤에도 <일본서기>에 임나가 등장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일반 상식으로 생각해도 비록 나라가 없어져도 그 이름은 지명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금관국은 법흥왕 19년(532)에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도 금관군金官郡으로 이름이 남았다가, 문무왕 20년(680)에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바뀝니다. 오늘날 김해 지명은 김해소경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대가야국은 대가야군大伽倻郡으로 이름을 한동안 남겼습니다.
왕이 강수에게 성명을 물었을 때 성으로 대답한 것이 '本任那加良人'이고 이름은 '牛頭'라고 하였다. 그래서 '본임나가량인'을 성으로 답한 것을 보면 석씨의 시조인 석탈해의 출신지를 말한 것이다. 석탈해의 출신지는 다파나국으로 일본에 있었다는 연구가 많다.
본(本)은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는데 이렇게 해석한 것은 김부식의 삼국사(三國史) 편찬 당시 본관제도가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인 서기 1146년 2월 4일 김부식의 주도로 편찬된 역사서를 ‘고려사(高麗史)’ 권17과 우리나라 국보 제322호에는 그 서명(書名)이 ‘삼국사(三國史)’로 되어있다. 조선시대 발행된 이 책의 서명(書名)이 모두 ‘삼국사(三國史)’로 되어있고, 정약용(丁若鏞) 선생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6집에서 ‘김부식삼국사(金富軾三國史)’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이 '삼국사기(三國史記)'라고 하는 것은 일본의 사크오(釋尾春芿)가 1908년에 ‘삼국사기(三國史記)’로 표제를 바꾸었는데 이것을
秋七月 新羅使人沙㖨部奈末 竹世士 與任那使人㖨部大舍首智買 到于筑紫
가을 7월 신라 사신 沙㖨部 奈末 竹世士가 임나의 사신 㖨部 大舍 首智買와 함께 축자에 이르렀다.
추고기 19년(611) 8월 기사입니다.
秋八月 新羅遣沙㖨部奈末 北叱智 任那遣習部 大舍 親智周智 共朝貢
가을 8월 신라가 沙㖨部 奈末 北叱智를 보내고, 임나가 習部 大舍 親智周智를 보내어 함께 조공하였다.
신라 사신 沙㖨部 奈末 竹世士 / 沙㖨部 奈末 北叱智
임나 사신 㖨部 大舍 首智買 / 習部 大舍 親智周智
임나 사신은 실은 신라 사신입니다. 임나 사신이 신라 6부인 양부=㖨部, 습비부=習部 소속이고 大舍라는 신라 관등을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