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는 성이 없어 ‘本任那加良人’이라 답변하였습니다. 무열왕은 강수를 ‘任生’이라 부릅니다. 이헌동님이나 제가 ‘李生’이라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조선시대 전적을 보면 ‘任强首’라 한 것이 더러 보입니다. 그렇다고 강수가 임씨인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本任那加良人’은 성을 대체할 만한 표현인 점은 인정이 됩니다.
‘본(本)’을 본관제와 연결지어 이해하는 것은 강수의 시대와 맞지 않습니다. 무열왕 시절 신라는 왕족과 일부 진골만 성씨가 있었습니다.
성씨와 특정 지역이 묶여서 사용된 시기는 고려 건국 이후 태조 왕건이 ‘토성 분정’을 한 다음입니다.
이헌동님의 글에 나오는 내용은 이덕일과 그 친구들의 말과 글에서 나온 것임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만약 이덕일이 <일본서기>를 한번만이라도 읽어보았다면 그와 같은 엉터리 주장을 할 수 없습니다.
이덕일은 <일본서기>를 잘 모릅니다. 이헌동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분별심을 가지기 바랍니다.
“처음에 반금 등이 신라에 건너가던 날, 배가 항구에 도착하였을 때, 장식한 배 1척이 해변에서 영접하였다. 반금이 “이 배는 어느 나라의 영접선인가?”라고 물으니, “신라의 배다.”라고 대답하였다. 반금은 또 “어찌하여 임나의 영접선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즉시 임나의 배 1척이 왔다. 신라가 영접선을 2척 준비하는 것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라 한다.”
반금은 일본에서 신라에 보낸 사신입니다. 이 기사를 보면 임나의 배도 신라가 준비합니다. 앞선 기사에서 임나 사신이 실은 신라 왕경에 거주하는 임나(가야) 출신이거나 후손들일 거라고 했습니다.
어쨌든 ‘本任那加良人’은 성을 대체할 만한 표현인 점은 인정이 됩니다.
‘본(本)’을 본관제와 연결지어 이해하는 것은 강수의 시대와 맞지 않습니다. 무열왕 시절 신라는 왕족과 일부 진골만 성씨가 있었습니다.
성씨와 특정 지역이 묶여서 사용된 시기는 고려 건국 이후 태조 왕건이 ‘토성 분정’을 한 다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