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씨는 탈해왕의 후손입니다. 만일 강수가 석씨로 신라 왕족이라면 무열왕이 어떻게 왕족을 몰라볼 수 있겠습니까?
강수 스스로 자신을 ‘본래 임나가량 사람’이라 소개한 것은 조상의 출자를 밝힌 것입니다. 임나 가량 사람이 신라 왕족 석씨일 수가 없습니다. 아울러 신라 왕족 석씨가 왕경이 아니라 중원경(충주)에 살고 있다는 것도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강수의 아버지가 성이 석씨라는 것을 왕이 알고 있’었다는 말은 열전의 기록과도 어긋납니다. 무열왕은 恨相見之晩 問其姓名 서로의 만남이 늦은 것을 한탄하며 그의 성명을 물었습니다. ‘강수의 아버지가 성이 석씨라는 것을 왕이 알고 있’었다면 성까지 물어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자리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석씨 족보에서 석체나마와 강수가 등장하는 것을 시비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문무왕 비문의 조상 이야기처럼 족보는 새롭게 밝혀지는 것이 있으면 다시 추가될 수 있습니다.
나마벼슬을 한 석체가 석씨가 아니라는 것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 석탈해의 후손들에게 상처를 줄수 있습니다. 지금의 석씨 족보를 가지고 쓴 이완영의 논문은 하자가 없습니다.
식민사학의 행태 중 가장 역겨운 것이 자기들의 학설을 비판하면 사이비라고 하는데, 가장 비학문적인 연구와 식민사관에 의거한 학설을 유지하고 연구를 하는 것이 고대사학계입니다. 근현대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추정으로 식민사학을 유지하는 유사역사학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居㭍夫 [或云荒宗] 姓<金>氏 奈勿王五丗孫 <祖>仍宿角干 <父>勿力伊湌
<金>陽 字魏昕 太宗大王九世孫也 <曽祖>周元伊湌 <祖>宗基蘇判 <考>貞茹波珍湌
從父兄昕 字泰 <父>璋如 仕至侍中波珍湌
斯多含 系出真骨 奈密王七丗孫也 <父>仇梨知級湌
<삼국사기> 열전에서 본인, 성씨, 가계가 함께 기재되어 있는 기사를 전부 살펴보아도,
본인에 대해 적을 때 성을 밝히지 않다가 부를 소개하면서 성을 밝히는 용례는 없습니다.
강수의 부 <석체>가 온전한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