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가 일본에 있었다는 김석형과 조희승도 위의 사실을 알고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 극복을 위한 연구를 하여 임나가 일본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였지요. 반면에 우리나라 가야사 학계는 식민사관을 극복한다고 하면서 즉 임나일본부는 우리나라에 없었다고 하면서 임나일본부가 설치되었던 임나는 우리나라 가야라고 하는 모순된 연구와 주장을 하고 있지요. 이런 모순에서 벗어나 정체성있는 역사연구를 하면 좋겠습니다.
이형우님도 김석형이나 조희승의 역사관을 지니면 즉 정체성있는 역사관을 지니면 우리나라 가야사 학계의 역사발전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참 안타깝네요.
역사학은 사료 ‘기록에 있는 대로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료도 검증하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일본서기>는 비록 정사이긴 하지만 내용에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본서기> 사료비판합니다. 그 다음으로 내용에 대한 비판적 검증을 합니다. 한국학자든 일본학자든 역사학자는 누구나 다 사료비판을 반드시 합니다.
일본서기 편찬 당시의 대외관계에 대한 관념, 주변국을 속국=번국으로 간주하는 관념으로 왜곡 윤색되어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서기는 읽을 때 일본 중심의 관념을 걷어내고 보아야 합니다.
일본은 이런 관념이 유난히 심한 나라입니다. 심지어 조선시대 통신사도 조공 사신으로 왜곡하였습니다. 학봉 김성일의 사행 기록을 보면 그 때문에 분쟁도 일어납니다.
임나가 일본에 있었다는 김석형과 조희승도 위의 사실을 알고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 극복을 위한 연구를 하여 임나가 일본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였지요. 반면에 우리나라 가야사 학계는 식민사관을 극복한다고 하면서 즉 임나일본
<일본서기> 효덕기 대화 2년(646)조에 “고구려, 백제, 임나, 신라가 나란히 사신을 보내 세금을 바쳤다”는 기사에 등장하는 임나가 무엇인가? 우리나라 가야가 맞나?
이헌동님이 물었습니다.
임나=가야 멸망 이후에도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의 정체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추고기 18년(610) 7월 기사, 추고기 19년(611) 8월 기사, 추고기 31년(623) 11월 기사를 들어 신라에 복속된 옛 임나=가야 지역을 가리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위의 이런 기사에 신라에 복속된 옛 임나=가야 지역을 가리킨다는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님의 주장일뿐이지요. 일본에 있었던 임나를 우리나라 임나로 인식한 억지를 합리화하네요. 상식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은 이형우님의 주장이 오류라고 알것입니다. 식민사학 후계들은 님의 주장을 인정하려고 하는지 모르지만
조선시대의 동사강목(東史綱目)과 증보문헌비고(贈補文獻備考) 등에서는 강수의 고향 충주를 임나가량으로 간주하여 충주를 임나라고 인식하였습니다.
충주는 마한지역으로 근초고왕 때 백제의 영역이 되었다가 장수왕 때 고구려의 영역이 된 곳으로 가야지역권이 아니지요. 그래서 임나가량 기록으로 가야를 임나라고 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이것을 식민사관에 의거 우리나라 가야를 임나라고 한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어 조선총독부에서 교육하였지요.
이형우님도 김석형이나 조희승의 역사관을 지니면 즉 정체성있는 역사관을 지니면 우리나라 가야사 학계의 역사발전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참 안타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