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임나는 일본열도에 있지 않았습니다. 일본서기에 임나가 200번 이상 나오는 것은 일본의 대외 관계에서 임나 곧 가야가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서기는 임나를 ‘바다 밖에 있는 금은의 나라’라고 하였습니다. 임나가 일본열도에 있어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임나 4현이 일본 땅에 있었다고 증명되었다고 하는데, 제대로 된 증명이 아닙니다. <일본서기> 계체기에 “이 4현은 백제와 인접해 있고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백제와는) 아침 저녁으로 통하기 쉽고 (어느 나라의) 닭과 개인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라 하였습니다. 임나 4현은 백제에 인접해 있고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사료에 분명히 나옵니다.
이헌동님,
조선총독부 식민사관 탓을 하기 이전에 사료에 나오는 기록을 먼저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삼국사기는 임나가 가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강수열전에서 강수는 “臣本任那加良人”이라 하였습니다. 지금은 신라인이지만 본래는 ‘임나가량인’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가량은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 7월 기사에 보입니다.
百濟王明襛與加良 來攻管山城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 관산성을 공격한 가량은 가야제국 중 대가야입니다.
삼국사기는 가량 곧 대가야가 임나임을 알려줍니다.
광개토왕비문과 진경대사탑비문도 임나가 가야임을 알려주는 자료들입니다.
본래 랑케 실증주의 사학을 회복하는 것이 한국 역사학이 지향해야 할 첫째 과제이며, 이후 다양한 연구 방법론을 개발해야 한국 역사학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광복 후 조선사편수회 출신인 이병도ㆍ신석호가 태두가 된 역사학계는 '일제 식민사학'이란 이름표를 '실증사학'으로 바꾸어 달고 객관성을 주창하면서 조선총독부 역사관이 마치 객관적인 실증사학인 것처럼 국민들을 호도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사료나 유물, 유적, 연구 등이 나와도 식민사학 유풍의 학설에 어긋나면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앞선 연구자들의 잘못을 그대로 이어가거나 덧붙이는 연구를 한다.
역사사실이 제대로 밝혀지면 자신들의 연구성과가 모두 물거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속에서 식민사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가야사 관련 임나가 가야라는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임나 4현이 일본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는데, 이 사실은 임나가 우리나라 가야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수 있게한다. 이것을 아
해방 후 이병도ㆍ신석호ㆍ이기백 등의 역사학자들이 식민사학이란 자신들의 역사학을 실증사학으로 바꾸어 달면서 랑케 실증주의 사학이 마치 제국주의 역사학을 옹호하는 것처럼 변질시켰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의 1장에서는 한국 역사에서 식민주의 사학의 문제점에 대한 논란이 왜 지속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2장에서는 랑케 실증주의 사학의 방법론과 의미, 역사관을 살펴보았고, 3장에서는 일제 역사가들이 랑케 실증주의 사학을 어떤 방식으로 제국주의 이념에 맞는 식민사관으로 변질시켰는지를 추적했다.
4장에서는 일제에 의해 변형된 실증주의 사학이 한국 역사학계에 수용된 과정과 오늘날까지 한국 사학계를 지배해온 실증주의 사학의 성격과 특징을 분석하여 식민사관과의 연관성을 찾고 이를 한국 민족주의 사학과 상호비교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결론 부분에서 한국 실증주의 사학은 원래 일본 제국주의 역사가들로부터 수용된 것인 만큼 민족의 개별성과 특수성이 강조된 본래 랑케 실증주의 사학을
임종권 박사는 <한국 실증주의 사학과 식민사관> 책에서 한국 실증주의 사학이 랑케의 실증주의 사학을 변질시킨 일본 제국주의 역사학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실제 랑케의 역사학을 근거로 밝혀내고 있다. 한국 사학계가 자신들을 실증주의 사학이라고 주장하면서 민족주의를 배제한 역사학을 객관적인 역사학으로 포장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 실증주의 역사학의 본 모습이 식민사학임을 호도하기 위한 것임을 논증하고 있다.
랑케는 <강국론> 등에서 제국주의 역사학을 비판하고, 각국 역사와 민족의 특수성을 옹호했던 독일 민족주의 성향의 역사학자다. 한국 실증주의 사학은 거꾸로 랑케 실증주의 역사학이 제국주의 역사학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일제는 메이지시절 랑케의 제자 리스를 초빙해 도쿄대학 사학과를 만들면서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학을 일본 제국주의 역사학으로 변질시켰고,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식민사학자들이 이를 근거로 한국사를 비하하고 왜곡했다. 해방 후 이병도ㆍ신석호ㆍ이기백 등의 역사학자들이
셋째, 임나 4현이 일본 땅에 있었다고 증명되었다고 하는데, 제대로 된 증명이 아닙니다. <일본서기> 계체기에 “이 4현은 백제와 인접해 있고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백제와는) 아침 저녁으로 통하기 쉽고 (어느 나라의) 닭과 개인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라 하였습니다. 임나 4현은 백제에 인접해 있고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사료에 분명히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