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6 14:02 (월)
광기에 휩싸인 '역사 장사치'들
광기에 휩싸인 '역사 장사치'들
  • 경남매일
  • 승인 2024.07.09 22:26
  • 댓글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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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2024-07-16 07:40:31
강수는 성이 없고 이름이 우두였는데 왕이 내려준 이름이 강수라고 하면서 강이 성씨는 아니라고 하네요. 그러면서 설총의 아버지는 나마벼슬을 한 사람이라고 하네요. 맞는 해석일까요.

신라시대 성이 없는 평민들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할수 없었고, 왕족이나 벼슬을 한 귀족들의 후손은 가능했지요. 어러서부터 학문을 한 강수가 왕족이나 귀족의 후예임을 알수 있지요.

그래서 강수의 아버지는 나마 벼슬을 한 석체가 맞지요. 식민사학자들은 우리역사나 역사의 인물들을 비하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연원은 조선총독부의 식민사관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이헌동 2024-07-16 06:09:23
자기 설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부정하고 자신의 추정은 맞다는 것은 학문을 함에 있어서 삼가해야 할 일이지요. 강수를 대가야인이라고 하는 것은 추정이지요. 그 근거가 어디있는지요.

562년 대가야가 멸망한 뒤인 <일본서기> '646년 대화 2년' 조에 "고구려, 백제, 임나, 신라가 나란히 사신을 보내 세금을 바쳤다"는 기사를 보면 임나가 존속한 것으로 우리나라 가야가 아니고 일본에 있었던 가야인들이 세웠던 것임을 확실히 알수 있는데. 이런 것이 나오면 또 일본서기도 부정하나요.

역사는 잘못된 역사관으로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잘못을 합리화하는 것만 심화될 뿐입니다. 식민사학 카르텔이 극복되면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사관의 틀에서 벗어나겠지요.

이형우 2024-07-15 23:01:00
역사학계에서 이러한 엉터리 논문을 제대로 반박하지 않고 무시하고 있던 상황이 오늘의 사태를 불러왔습니다. 역사학계에도 책임이 없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역사를 애호하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난동 수준의 저들의 행패를 더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사료를 놓고 한 주제로 <논리 대 논리>로 토론하는 일을 환영합니다.

이형우 2024-07-15 22:53:56
중원경(충주)를 임나라고 본 동사강목이나 증보문헌비고의 인식은 ‘오류’임에 동의합니다. 말씀대로 충주는 가야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인식도 그렇습니다.
강수는 무열왕이 내려준 이름입니다. 본명은 ‘우두’입니다. 강수는 성이 없어 무열왕에게 성이 무엇인지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강수의 성이 강씨라는 인식도 사실이 아닙니다.

강수의 성이 석씨라는 이완영의 논거는 모두 쉽게 논파됩니다. 삼국사기 열전의 인명 기재 방식에 대한 몰이해, 20세기에 변조된 족보 등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외에 환단고기라는 20세기 위서를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이완영은 잘못된 논거에서 출발하여 임나가 일본열도에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근거가 오류이므로 논지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형우 2024-07-15 22:33:17
그 4현의 위치라고 증명했다는 4현 중에
모루(牟婁)현이 있다는 와카야마현(和歌山縣)은 일본 긴키(近畿) 지방이며,
나머지 세 현이 있다는 고치현(高知縣)은 시코쿠(四國) 남쪽 태평양 연안 지방입니다.
와카야마현과 고치현, 두 지역 사이는 거리는 300km가 넘습니다.

한자리에 있어야 할 4현이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그곳이 임나 4현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이름만 같은 ‘同名異地’의 지명일 뿐입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임나는 가야라고 하였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였지 임나가 가야임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임나=가야설과 임나일본부설은 별개의 개념입니다. 필자 유우창의 취지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