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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유형문화재 제 39호 다솔사 보안암 석굴
경남도유형문화재 제 39호 다솔사 보안암 석굴
  • 승인 2006.12.11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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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 연대 고려시대 아니고 신라시대”
한학자 추전 김화수씨, “서봉사 관련 문헌에 신라 신문왕때 기록” 주장
경남문화재연구원, “불상 제작 방식 고려시대 것이지만 확실하지 않다”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된 다솔사 보안암 석굴(多率寺普安庵石窟.사진)이 고려시대가 아닌 신라시대에 창건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한학자 추전 김화수씨는 1336년(고려 충숙왕) 이곡(李穀)이 쓴 ‘서봉사사적’과 1657년(조선 효종) 고성현령 최응천(崔應天)이 쓴 ‘서봉사기’ 문헌에 신라 문무왕(681년~680년)때 창건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어 다솔사 보안암 석굴이 지금까지 알려진 고려시대가 아닌 신라 신문왕때 창건된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서봉사사적’에는 신라 신문왕 4년(684년)에 신문왕의 두 왕자가 의명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2년간 머물면서 서봉사를 중창하고자 김해군일(鎰)과 그 부인 홍씨와 합작해 100만량을 내어 서봉사를 짓고 그 남쪽 고개(천령.天嶺)위에 석굴(보안암 석굴)을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이 석굴은 용화세계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석감을 쌓고 그 안에 미륵석상을 경건히 조각해 봉안했으며 이 미륵석상을 산도깨비와 귀신 모양을 한 기단이 지키고 있다는 상세한 내용이 적혀있다.

현재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서봉사사적’을 쓴 이적은 고려 충렬, 충선, 충숙왕 3왕조(고려실록)를 저술한 고려말기 학자.

또 17세기 중엽 최응천도 미륵봉의 석실 안에 장륙석불(丈六石佛)이 봉안돼 있다고 서술해 보안암 석굴의 창건연대가 신라시대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청건연대가 고려시대라 명시돼 있고 보안암 석굴 입구에는 고려시대일 것이라 추정하는 안내문구가 적혀 있다는 것.

이에 경남문화재연구원은 인공으로 만든 이 석굴은 규모나 평면 형태, 모시고 있는 불상 등에서 비록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전실(前室)의 목조가구수법은 한국의 석굴이나 마애석불(磨崖石佛)의 전면에 설치하던 전통적인 방식을 보여주고 있어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 구조를 따른 고려시대의 석굴이라고 주장했다.

경남문화재연구원 관계자는 “문헌의 기록이 있다고 다 맞는 것은 아니다”라며 “보안암 석굴에 대한 관련 문헌들은 역사적, 미술사적으로 신빙성이 떨어진다”며 면밀한 고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제작 양식만으로 고려시대라고 추정했을 뿐, 이 또한 확실한 것이 아니다”고 말해 문화재에 대한 고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시인했다.

한편 사천시 곤양면 무고리 산43에 위치한 다솔사 보안암 석굴은 일명 미륵암(彌勒庵)이라고도 불리며 원래 서봉사에 딸린 암자였으나 서봉사가 폐지됨에 따라 다솔사로 귀속됐다. 보안암 석굴 안에는 결가부좌한 석조여래좌상이 안치돼 있고, 좌상 뒤에는 아주 작은 돌을 쪼아 만든 16구(具)의 나한상(羅漢像)이 각 8구씩 좌우로 배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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