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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MBC터, 진주객사·봉명루 위치
옛 MBC터, 진주객사·봉명루 위치
  • 승인 2006.10.11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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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 ‘객사서문’ 등 문헌기록 전해
“두 번 화재 여러 해 지난 후 1403년목사 광주안공이 옛터 찾아”

진주시내 최대 규모(지하3층 지상 22층)로 건립예정인 롯데인벤스가 들어설 옛 MBC 터는 이전부터 진주객사와 봉명루가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정확한 양상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와 관련해 여러 문헌기록이 있다.

객사는 원래 중앙정부의 왕을 상징하는 중요 건물이어서 대체로 읍성 내에 가장 중요한 위치에 객사 건물을 배치하고, 관아와 향청의 공공건물을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진주목의 경우는 객사를 성 내에 두지 않고 진산인 비봉산 아래에 두었고, 본주인 목관아를 서쪽방향에 설치하고, 그 아래 향청을 배치했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진주객사는 1403년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기록돼 있다.

문헌기록 뿐만 아니라 지표에서 수습된 고고자료에서도 고려시대의 어골문와편 등과 고려청자편 등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그러한 가능성은 매우 높다.

현재 진주객사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진주객관중수소지(晋州客館重修小識)’ 하륜의 객사서문에 의하면 “두 번의 화재로 다시 짓지 못한 지가 여러 해 지난 후 1403년(태종3년)에 목사 광주안공이 옛터를 찾아 그 구조를 조금 넓혀 새로 지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객사의 남쪽 대문 앞에는 봉명루가 있었는데, 하륜의 봉명루기에 “봉이란 왕자의 서조(瑞兆)로 최공의 한 고을을 맡아서 왕화를 펴매 봉명(鳳鳴)으로 루(樓)를 이름하였으니, 문무의 덕으로써 임금님께 기대해 오봉의 상서가 있기를 바란다” 고 기록돼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진주목 조’에는 “봉명루(鳳鳴樓)는 객사(客舍) 남쪽에 있고, 촉석루(矗石樓)는 용두사(龍頭寺) 남쪽 돌벼랑(石崖) 위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 세종 때에는 진주의 대표적 누각이 봉명루와 촉석루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봉명루는 진주 객사에 따른 누각이었다.

‘진양지’에 “진주 객사는 비봉산 아래 고경리(古京里)에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현재 진주MBC가 있던 자리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륜의 봉명루기(鳳鳴樓記)’에는 “객사 남쪽 100보 남짓에 예전 누 3칸이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고, 1558년 남명 조식 선생의 봉명루에 대한 시 한수가 기록돼 있다.

남명 선생은 두류산 유람을 하기 위해 삼가에서 마현(현재 말티고개)을 넘어 진주로 들어왔고, 이때 진주목사 김홍과 연결돼 남명 일행은 진주객사에 머물면서 봉명루에 올랐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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