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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으로 먹은 쇠고기 '조선명법우육환'
약으로 먹은 쇠고기 '조선명법우육환'
  • 경남매일
  • 승인 2024.10.01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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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일본의 중앙집권적 정치 체제를 확립했던 아스카 시대(飛鳥 時代) 중반 제40대 덴무 천황(天武 天皇, 631-686)이 675년 육식을 금하도록 선포한 명령 이후 1872년 122대 메이지 천황(明治 天皇, 1852~1912, 재위 1867~1912)이 해제할 때까지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고기를 먹지 못했다.

물론 개중엔 남들 눈치 보며 몰래 먹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놓고 고기를 먹지 못했다.

일본인들은 동물을 키워도 잡아먹을 용도로는 키우지 않았다. 소는 오직 농사에만 사용했고 말은 교통수단으로만 사용했으며 닭은 알람 시계, 계란 생산에만 사용했다. 그리고 만약에 가축을 키우다가 죽으면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고 기름을 짜내 불붙일 때 사용했지만 절대로 살을 발라내 먹지 않았고 나머지 부위는 땅에 묻었다.

1763년에 펴낸 '화국지(和國志)' 음식(飮食) 편에 보면 11대 조선 통신사(1763년)의 일행 중 한 명이었던 원중거(元重擧, 1719∼1790)는 에도시대 당시 육식을 하지 않는 일본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여섯 가지 가축(소, 말, 양, 닭, 개, 돼지)을 먹지 않으며 집안에서도 키우는 마축이 드물다. 풍속에서 도살을 기피하는데 개나 말이 가장 심하다. 가축이 죽으면 모두 땅에 묻는다. 소가 만약 병들어 죽으면 태워서 기름을 취하여 등(燈)을 태우는 데 쓴다. 이런 일은 천한 자들로 하여금 맡아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꺼려서 나가보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즉시 그 나머지 살과 남은 뼈를 땅에 묻는다. 혹 병자의 약으로 쓸 경우에는, 소를 낭떠러지 위에 세워 놓고 밧줄로 끌어서 거꾸러뜨려 추락사하면 적당히 약용을 취하고 그친다. 나머지도 죽은 소의 예와 같다.

집돼지는 가정에서 키우는 것이 전혀 없다. 우리 사행을 위하여 멧돼지를 산 채로 잡아서 보내주었기에 잡게 하여 음식으로 하였다. 닭 또한 드물게 키우는데 그 키우는 자들은 단지 때를 알려주는 것만 취할 뿐이요 음식으로 먹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처럼 오랫동안 지속된 명령이었기에 당연히 일본 식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양갱(羊羹)이란 원래 이름대로 양고기에서 나온 선지로 만든 요리였는데, 일본에서 선지를 팥으로 대체해서 만든 것이 현재의 일본식 양갱이 되었다.

만쥬 역시 중국은 만두를 두꺼운 피에 여러 고기, 야채, 향신료를 넣어 주식으로 먹고 한국은 얇은 피에 고기, 야채, 두부, 당면을 넣어 반찬으로 먹지만 일본은 밀가루 피 안에 팥앙금을 넣어 간식으로 먹었다.

육식 금지는 너무나 폭이 넓기 때문에 여러 회피 수단이 등장했다. 일부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심지어 집권층까지 약재용이니 뭐니 이런저런 꼼수로 고기요리를 즐겼으며 다양한 편법으로 법망을 피해 고기를 즐겼다.

그러다 보니 에도시대(江戶時代) 일본에서는 육포 형태로 말린 쇠고기를 가루를 내어 '조선명법우육환(朝鮮名法牛肉丸)' 혹은 '조선우육반본환(朝鮮牛肉返本丸)'이라는 이름으로 팔았는데, 조선의 비법으로 만든 이 쇠고기 환약(알약)이 인기리에 판매되었고 거의 만병통치약처럼 여겨졌다.

이런 쇠고기 약의 인기는 당시 에도막부의 쇼군(將軍)에게 선물하는 품목의 하나였을 정도였다. 특히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물 건너온 것'이 훌륭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물 건너온 것'이란 물론 중국이나 조선에서 온 물건을 말한다.

육식을 하지 않다가 약을 핑계로 쇠고기를 먹으면 그 맛이 얼마나 훌륭하고 힘이 났을지 짐작이 된다. 그랬던 일본인들이 쇠고기를 약이 아닌 음식으로 먹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때 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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