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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 공즉시생
색즉시공 공즉시생
  • 경남매일
  • 승인 2024.09.29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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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가을이 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날씨가 선선해졌다. 조석으로 다소 쌀쌀한 느낌마저 든다. 간사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 더우면 덥다고, 추우면 춥다고 호들갑을 떤다. 복더위로 숨 고르기를 했던 독서를 다시 시작했다. 에어컨을 켜지 않은 순수한 자연공기가 학습의욕을 일깨운다.

얼마 전 구입한 후 서문만 읽은 철학자 최진석 박사의 <건너가는 자>의 내용이 궁금해 책장을 열었다. 제목이 풍기는 묘한 뉘앙스에 끌려 샀는데 불경 <반야심경(般若心經)>에 관한 얘기다. 저자가 서명을 <건너가는 자>로 붙인 이유가 궁금했다. '<반야심경>이 불교라는 종교의 경전이면서 만물의 형성 원리를 다루는 동시에, 사람의 태도에 관한 철학서이기 때문이다. 삶의 태도에 관하여 <반야심경>은 항상 익숙한 이곳에서 새로운 저곳으로 건너간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말한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간다. <반야심경>은 대승불교의 모태가 되는 총 600권 분량의 반야경을 260자로 요약한 불교경전이다. 불경 자체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으로 원어 산스크리트어를 당나라 현장법사가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다른 번역본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현장법사역본을 중시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은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는 뜻으로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는 말이다. 이 경구는 원래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라는 문장에서 앞부분만 따온 말이다. 이런저런 상황에서 문맥과는 상관없이 많이 인용하는 문구다. 정치인이나 식자들이 사자성어로 뭔가 유식해 보이고 싶은 상황에서 자주 써먹는 말이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오온(五蘊)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으로, 색은 육체와 물질, 수는 지각과 느낌, 상은 표상과 생각, 행은 욕구와 의지, 식은 마음과 의식을 말한다. 여기서 공(空)은 무(無)와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무는 존재 자체가 없다는 것이고, 공이란 어떤 존재가 실존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무는 아예 존재 자체가 없는 것이고, 공은 있는 듯 보이지만 따져 보면 그 존재의 실체라는 것이 없어 실제로는 없다는 의미이다. 범인이 이해하기엔 무척 형이상학적이다.

따라서 이 오온이 모두 허상임을 깨달으면 모두 생의 고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반야심경>의 핵심이다. 불교에서는 상호의존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립하는 부분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공의 세계관 안에서는 어떤 것도 자신만의 흔들림 없는 정체성을 기반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존재 자체가 관계이며 서로 다른 둘이 섞여버린다는 것이다. 주역에서 음과 양의 관계를 말할 때 '음속에 양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공이기 때문에 색이 될 수 있으니 공성(空性)이 없으면 색이 될 수가 없는 것처럼, 색 또한 공의 논리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한 단계 더 이해하기 위해 <반야심경>에 있는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의 뜻을 살펴보자. '세상의 모든 것이 공이라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더해지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다'는 뜻이다.

이 중 불구부정은 원효대사의 해골 물 마신 일화로 인구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원효대사가 불법을 연구하기 위해 당나라로 가는 길에 날이 저물어 잠을 자다가 목이 너무 말라 깨어났다. 손을 더듬어 보니 웬 그릇에 물이 있어 한 모금 시원하게 마시고 잤다. 아침에 깨어나 보니 옆에 해골바가지가 놓여 있었다. 어젯밤에 마신물이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인 것을 알고 나니 구역질이 났다.

이에 큰 깨달음을 얻은 원효대사는 당나라로 가지 않고 신라로 되돌아와 구도에 열중해 득도했다고 한다. 이는 시원하게 마실 때는 '색수상행식'이 묘하게 인연이 되어 시원하다는 느낌으로 다가온 것이고, 구역질이 날 때도 '색수상행식'이 인연이 되어 더러운 느낌으로 다가온 것이다. 깨끗함과 더러움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연에 따라(인연생기) 깨끗한 느낌으로 드러날 때도 있고, 더러운 느낌으로 드러날 때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깨끗함과 더러움 자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가유(假有)의 상태로 잠시 존재하다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존재하는 불생불멸일 뿐이다. 생기거나 소멸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그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고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흔들리고 위태로운 이 시대에 마음의 등불이 되는 지혜가 담긴 경전이 <반야심경>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오묘한 법리를 십 분의 일이라도 공감한다면 고달픈 일상에 찌든 심신이 평안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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