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5 22:33 (화)
누가 사이비역사학자인가 ③
누가 사이비역사학자인가 ③
  • 경남매일
  • 승인 2024.09.05 22:57
  • 댓글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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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김해근대역사위원회 위원장
이헌동 김해근대역사위원회 위원장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역사' 282쪽에 "그런데 '사이비역사학'이라는 명명은 이러한 여러 측면을 소거해버린다는 난점이 있다. 또한 이 논전의 관전자들이 사이비라는 명명을 식민사학의 거울상으로 오해할 우려도 있다."는 글이 있다.

285쪽에는 이런 글도 있다. "'사이비역사학'이라는 표현이 무척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표현이 학문의 다양성이나 대화의 가능성을 차단시킬 수 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처음에 이 용어를 사용할 때도 그런 고민이 많았다. 그럼에도 현 상황은 '사이비역사학'이라는 단호한 표현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본질을 드러낼 가장 적확한 용어가 '사이비역사학'이라는 결론이다."

이에 대해서 김상태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젊은 주류 고대사학자들이 '사이비역사학'이라는 개념을 두고 얼마나 노심초사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들은 이 단어의 근원적인 의미를 자각하고 첫 인용문에서 사이비라는 명칭이 '식민사학의 거울상'이라 말하고 있다. 식민사학이 거울에 비치면 그 거울에 '식민사학=사이비역사학'이라는 본질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오해할 우려가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낀다는 걸 반증하는 말이다. 이처럼 그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자신들이 '사이비역사학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젊은 주류 고대사학자들은 이 치명적인 자기폭로, 즉 남을 사이비라 말하면서 자신의 사이비성이 폭로될 수 있다는 심연의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심연에서 은밀하게 밀려오는 그 공포마저 넘어서야 할 만큼 사태가 심각했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 용어를 사용해야 했던 피맺힌 사연이 바로 두 번째 인용이다. 사이비역사학의 진심어린 자기증명이다.

동북아역사지도 폐기 사태는 해방 후 주류 고대사학계가 맞이하는 최대의 타격이자 위기였다. 이들은 그 이유가 이덕일을 비롯한 사이비역사학자들의 선동과 이에 동조하는 정치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무서워서 약간 비판하고 만만한 이덕일 무리는 죽도록 욕한다. 절반은 분풀이고 절반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덕일 무리와 정치인들이 그들을 위기로 내몬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반성할 줄 모르는 그들의 누적된 오만과 작당이 가장 큰 요인이다.

주류 고대사학계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적반하장으로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사이비역사학자로 몰고 있는데, 보편타당한 상식을 지닌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사이비역사학이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식민사관으로 만든 역사를 따르는 식민사학이다. 그래서 식민사학 유풍의 역사연구를 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이비역사학자가 된다.

'일본서기'에 스이코(推古) 천왕 시절인 서기 600년 "신라와 임나가 서로 공격, 신라와 임나가 왜에 사신을 보냄, 신라가 임나를 또 공격함, 왜가 신라와 임나의 사신을 초대하여 스쿠시에 도착, 왜가 장식마 부대장을 임명하고 임나 사신을 영접함, 임나 사신 귀국길에 오름" 등의 기사가 있다.

611년 임나가 사신을 왜에 파견, 623년 임나가 왜에 사신을 파견, 신라가 임나를 공격, 왜가 사신을 임나에 파견, 638년 백제, 신라, 임나가 사신을 왜에 파견, 642년 왜왕이 사신을 임나에 파견, 646년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 4나라가 공물을 헌납하고 세금을 납부함

김해의 금관가야가 532년, 고령의 대가야가 562년에 멸망하였다. 그런데도 임나는 646년에도 존속하여 '일본서기'에 나온다. '일본서기'의 임나가 우리나라 가야가 아니고 고구려, 백제, 신라도 왜에 세금을 납부한 일본에 있었던 소국임을 알수 있다. 그래서 임나가 우리나라 가야라고 하면서 임나관련 지명을 우리나라에서 찾는 사람들은 사이비역사학자가 된다. 식민사학이 없는 북한학계에서는 일본의 기비지역에서 임나관련 지명을 찾아서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와 조희승의 '임나일본부 해부' 책에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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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리 2024-10-04 16:27:56
■■■ 고대 요동이 (요하 동쪽인) 지금의 요동이라는 주장은 사이비 역사다

■ 우리가 알고 있는 고조선부터 고구려 장수왕 시기까지 영토 변화

1) 고조선 지표유물인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 분포에 따른 고조선 최대 영토는
(1) 요하 서쪽인 지금의 요서 지역(산해관이 있는 진황도시 동쪽)과
(2) 요하 동쪽인 지금의 요동 지역과
(3) 한반도 전부다(한반도 중북부 지역만 고조선 영토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주) 제시한 "고조선 관련 문화 범위" 지도 참조

고조선 최대 영토는
전국시대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침공하기 전의
고조선 전성기 시절이 고조선 최대 영토로 알려져 있다

수구리 2024-10-04 16:19:17
■■ ■ 반도사관(식민사관)의 출발점은
삼국지 위서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의 해海의 틀린 해석이 반도사관(식민사관)의 출발점

■ 삼국지 위서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의 삼한의 위치는 "(三)韓 東西以海爲限"
1) 삼국지 위서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에 낙랑군 대방군과 예 삼한 고구려 동옥저 등
고조선 열국들의 상대위치와, 영토 크기 및 지형적인 특성이 있다

2) 고대 중국인은 큰 강이나 큰호수를 해(海)로 표현했다(바다도 해海라고 했지만)
특히 하북성 중남부의 북쪽으로 흐르는 춘추시대 고대 황하를 사마천 사기에서 해(海)라고 했다

鳥夷皮服 夾右碣石 入于海 (集解)徐廣曰 : 海 一作河
조이의 특산품은 짐승가죽 옷인데,
갈석산을 오른쪽(서쪽)으로 끼고 황하(해海)를 통해 운송되었다

수구리 2024-09-12 13:38:02
북주(北周, 557년 ~ 581년) 역사서인 주서에
대방고지의 부여(비류백제) 위구태가 백제 시조로 기록된 이유는

■ 무령왕(재위 501 ~ 523) 부터
일본열도를 다스리던 좌현왕으로 열도백제왕인
비류백제 위구태 후손 우優씨인 비류계가 백제왕이 되었으니
주서와 북사에 우태(=주몽) 아들 비류의 후손 위구태를 백제 시조로 기록한 것이다

■ 부여 의려왕(백제 고이왕) 이후에 백제왕은
1) 비류왕(재위: 304 ~ 344), 근초고왕으로 이어지는 온조후손이 백제왕통을 이었고
2) 개로왕(455〜475), 문주왕, 삼근왕,동성왕(재위 479~501)까지 온조계열인 모씨가 백제 왕이었다

수구리 2024-09-12 13:28:11
1) 삼국사기에 가야는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서기 42년에 건국되었고
2) 중국 고대사서인 후한서/삼국지/진서 동이열전과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일본서기를 교차검증하면

(1) 동이열전의 (위)구태의 부여가 비류백제이고
(2) 동이열전 (위)구태의 부여(비류백제) 의려왕이 삼국사기 백제 고이왕으로
(3) 일본서기와 백제본기, 동이열전의 교차검증으로
일본서기 신공황후 47년(AD 247년)에 (위)구태의 부여(비류백제)가 왜의 실권을 장악했고
일본서기 웅신천왕 16년( 285년) 8월에
120현의 부여(비류백제)사람들이 열본열도로 건너가서 왜를 부흥시켰다

■ 주서/북사에서 백제시조가 구태이니
후한서/삼국지/진서의 (위)구태 부여가 비류백제다

이형우 2024-09-12 12:03:31
1. 추고기 17년(609) 축자에 표류해온 백제 사신이 귀국 경로에 대마도를 지나갑니다. 이 백제는 어디 있는가?
2. 추고기 18년(610) 왜국 조정을 방문하는 신라, 임나 사신 뭐하러 멀리 서쪽으로 축자까지 가는가?
3. 추고기 26년(618) 고구려는 수양제 대군을 물리칩니다. 이 고구려가 어디에 있는가?
4. 효덕기 대화 3년(647) 신라에서 김춘추를 사신으로 보낸다. 이 신라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5. 이헌동님이 읽은 <일본서기>는 누구 번역본인가요?
6. ‘문성재의 답변을 참고해서 적은 글’ 다시 보여주세요.

정저지와 타령 그만두고..

이헌동은 왜 응답이 없는가? 시간은 넉넉하게 지나지 않았는가 말이다.
설마 <일본서기>를 읽지도 않고 마구 던진 말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