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보선 시인 '나날들'
초대장 없이 같은 숲에 모여들어
지금 여기 아닌 곳에서 안심하죠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 우리는 존재 속으로 던져진 존재인가? 초대받지 않고 이 세상의 존재 속으로 진입했을까? 우리가 초대장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우리의 삶은 평온할까. 언제쯤이면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을 꿈꾸는 일을 그만둘까 궁금하다. 초대장과 상관없이 여전히 지금의 삶과 비슷하게 살고 있을까.
'우리는 초대장 없이 같은 숲에 모여들었다'로 시작하는 심보선의 시 '나날들'을 찬찬히 읽고 들여다보다 보면 하얀 쌀밥처럼 씹으면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난다. 우리 인생의 나날들에 대한 성찰과 인간의 어리석음을 경구처럼 압축해서 보여준 시다.
존재로 던져진 우리는 살기 위해서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한다. 충실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한다. 적어도 청춘의 꽃이 시들기 전에는 치열하게 투쟁하듯이 산다. 가치에 투쟁하고,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면서 최선을 다해 생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생에 충실한 청춘은 어떤 청춘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가치를 세우고 그 가치들을 돌보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는 늘 죽음을 내다보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하다. 불안을 잊기 위하여 환영 속으로 도피한다. 도피의 장소는 많다. 현실의 삶에 기뻐하지 못하고 지금 누리지 못하는 것, 갖지 못한 것에 결핍감을 느끼며, 너무 많은 것을 반성하며, 자신을 죄인으로 몰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행복도 미래를 위해 아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을 긍정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인간 존재는 부족하고 이지러져 있고, 갈등하고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철저히 긍정할 때가 아닐까. 부단히 더 나은 인격을 닦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지만. 이상의 설정이 과하면 과할수록 지금 여기서 안심하지 못하고 쫓기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내 곁에 없는 것들을 꿈꾸고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시선을 미래가 아닌 현재에 두고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남아 있는 '나날들'은 어떠해야 할까. 심보선의 시 '나날들' 속에 우리들의 모습을 비춰보는 것은 어떨까.
나날들
우리는 초대장 없이 같은 숲에 모여들었다. 봄에는 나무들을 이리저리 옮겨 심어 시절의 문란을 풍미했고 여름에는 말과 과실을 바꿔 침묵이 동그랗게 잘 여물도록 했다. 가을에는 최선을 다해 혼기(婚期)로부터 달아났으며 겨울에는 인간의 발자국 아닌 것들이 난수표처럼 찍힌 눈밭을 해맸다. 밤마다 각자의 사타구니에서 갓 구운 달빛을 꺼내 자랑하던 우리, 다시는 볼 수 없을 처녀 총각으로 헤어진 우리. 세월은 흐르고, 엽서 속 글자 수는 줄어들고, 불운과 행운의 차이는 사라져갔다. 이제 우리는 지친 노래처럼 노변에 앉아 쉬고 있다. 청춘을 제외한 나머지 생에 대해 우리는 너무 불충실하였다.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서만 안심한다. 이 세상에 없는 숲의 나날들을 그리워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