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에게 예쁜 생맥주 컵을 하나 선물로 받았다. 예쁘긴 했지만 가정에서 생맥주를 마실 일이 없으니 제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붓을 꽂아두는 필통으로 사용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꽃을 선물 받았다. 꽃을 꽂을 데가 없어 붓을 옮기고 그 컵에 꽃을 꽂았다. 돌연 생맥주 컵이 화병이 되었다.
맥주를 부어 마실 땐 맥주 컵이었다. 그러다 그곳에 붓을 꽂으니 필통이 되었다. 다시 그곳에 꽃을 꽂았더니 화병이 되었다.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원래 기능은 사라지고 현재의 역할에서 그 효용 가치가 결정되었다. 순간 중국 유우석의 <누실명>에 나오는 구절이 생각났다.
글에서 작가는 "물의 가치란 깊이에 있지 않고 용이 살면 그 물이 영험하게 된다.(水不在深有龍則靈)"고 했다. 용의 존재 유무에 따라 물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점에 방점을 두었다. 우리네 인생 역시 비슷한 논리로 해석이 가능하다. 어떤 자리에 누가 있느냐로 그 자리의 가치가 만들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어느 골짜기에 깡패가 들어가 살면 '깡패골'이 되고, 군자가 들어가 살면 '군자골'이 된다. 누가 존재하느냐에 따라 그 장소의 이름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게 된다. 공자는 일찍이 이런 점을 특별히 강조한 바 있다.
어느 날 공자가 조국인 노나라를 떠나 오랑캐 땅인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누군가가 그곳은 누추할 텐데 어찌 살겠느냐고 걱정을 했다. 그러자 공자가 반문한다. "군자가 사는데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君子居之何陋之有)" 공자 자신이 가서 살게 되면 그곳은 곧 군자의 땅이 될 것이라는 의미다. 자신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우린 평소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해 갈 때, 혹자는 그 환경에 지배를 받아 피동의 삶을 살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그 환경에 자신의 향기를 뿌리고 색깔을 입혀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놓기도 한다. 능력의 한계를 가진 우리들이기에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진 않지만 가능하면 환경에 지배를 당하기보단 내 방식대로 뭔가를 만들어가고 이끌어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