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5 16:11 (화)
누가 사이비 역사학자인가 ①
누가 사이비 역사학자인가 ①
  • 경남매일
  • 승인 2024.08.22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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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김해근대역사위원회 위원장
이헌동 김해근대역사위원회 위원장

공석구는 2015년 한국 상고사 대토론회에서 주제발표 15분 대부분을 태강지리지에 관한 것을 발표했다. '낙랑군 수성현은 갈석산에 있고 이곳은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 산해관 근처에 만리장성 동단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면 주류 고대사학계의 소고조선론과 낙랑군 평양설이 허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석구는 실전하지도 않는 태강지리지에 있는 구절들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전승된 사료가 다양해서 믿을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만리장성이 지금의 요동까지 있었다는 소고조선론의 주장이 맞고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도 맞다는 것이다.

윤내현의 태강지리지에 대한 주장은 다음과 같다. [전승된 사료가 다양하다는 것은 맞다. 태강지리지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사료들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혼돈된 사료들을 철저히 연구하여 가부를 가려야 한다.

태강지리지도 마찬가지다. 전승들 중 옳은 것은 취하고 그른 것은 버리거나 교정해야 한다. 이것이 역사학자의 첫번째 임무다.

그럼 어떻게 그 작업을 할수 있는가. 우선 주어진 사건에 가장 근접하고 신뢰성 있는 사료들을 선택하여 사실을 재구성해야 한다. 다음에 그렇게 구성된 사실을 통해 후대의 사료나 잘못된 사료를 평가 구분 교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낙랑군 수성현 갈석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어떤 사료를 선택해야 하는가. 먼저 당대의 기록인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 본기'와 '효무본기'를 사료로 선택한다. 가장 신뢰할수 있는 사료다.

이 사료에 보면 중국과 고조선의 경계는 갈석산 근처라고 되어있고, 그 지역을 당시는 요동이라고 불렀다. <사기> '몽염열전'에는 만리장성 동단이 요동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래서 이 사료들에 의하면 갈석산과 낙랑군 수성현이 함께 있었다는 태강지리지의 기록은 옳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주장을 위해 윤내현이 활용한 사료들이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갈석산 지역이다> 사료 1 『사기』 권88 「몽염열전」사료 2 『사기』 권110 「흉노열전」사료 3 『태강지리지』 『사기』 권2 「하본기」의 갈석에 대한 주석인 『사기집해』에 수록] 사료 4 『통전』 권186 「변방」 <동이> '고(구)려' 사료 5 『진서』 권42 「당빈열전」사료 6 『통전』 권178 「주군」 <평주> 노룡현에 대한 주석<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난하이다> 사료 1 『회남자』 권4 「추형훈」 사료 2 『염철론』 권9 「험고」사료 3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고구려전> 사료 4 『삼국지』 권30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전> 사료 5 『삼국유사』 권3 「흥법」 <순도조려> <요동은 2가지 의미가 있다> 사료 1 『제왕운기』 권 하 사료 2 『한서』 권28 「지리지」하 사료 3 『한서』 권40 「장진왕주전」

윤내현은 이런 방식으로 대고조선론을 주장하였다. 고조선 시대의 요하도 이런 식으로 연구하여 북경 동북쪽에 있는 난하라고 하였다. 고조선 연구로 중국 북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북한의 이지린의 주장도 그러하다. 북한학계는 낙랑군 평양설을 폐기하고 낙랑군 요동설을 취하고 있다.

김상태는 철저한 검증을 통하여 윤용구나 <역사비평>에 논문광풍을 불러 일으킨 젊은 학자들을 사이비 역사학자라고 부르는 건 매우 적절하다고 한다. 왜 이들을 사이비 역사학자라고 부르는가에 대한 자세한 것은 <고조선 논쟁과 한국 민주주의> 책에 잘 나와있다.

이 젊은 주류 고대사학자들은 소고조선론을 주장하여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이들은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려고 한 사료나 유물 해석을 활용하여 낙랑군 평양설을 견지하고 있다. 중국이 동북공정에 방해가 된다고 한 이론이나 사료, 유물해석이 고조선 역사임에도 그러하다. 이들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협조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도 동북공정 전에는 진나라의 만리장성 동단이 산해관 인근이라 하였고, 필자도 그렇게 배웠다.

이런 경향의 사학자들로 기경량, 안정준, 위가야, 조인성, 박대재, 신가영, 이문영 등이 있다고 한다. 김상태는 이문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한다. "이문영은 환빠(환단고기 추종자)들을 유사역사학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문영이 역사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 말은 바로 본인을 가리키게 된다. 환빠 유사역사학자와 이문영이라는 식빠(식민사학 추종자) 유사역사학자가 잘 어울리는 순간이다. 이문영은 이덕일 때문에 입지를 보장 받는다. 스토커가 되는 양 이덕일을 따라다니며 비판하고, 이를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한다. 주류 고대사학계는 이런 이문영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덕일은 이런 이문영을 신경쓰지 않는다."

이글은 <고조선 논쟁과 한국 민주주의> 책과 <사료로 보는 우리 고대사> 책을 참고하여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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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리 2024-10-04 07:35:31
■■■ 고대 요동이 (요하 동쪽인) 지금의 요동이라는 주장은 사이비 역사다

■ 우리가 알고 있는 고조선부터 고구려 장수왕 시기까지 영토 변화

1) 고조선 지표유물인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 분포에 따른 고조선 최대 영토는
(1) 요하 서쪽인 지금의 요서 지역(산해관이 있는 진황도시 동쪽)과
(2) 요하 동쪽인 지금의 요동 지역과
(3) 한반도 전부다(한반도 중북부 지역만 고조선 영토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주) 제시한 "고조선 관련 문화 범위" 지도 참조

고조선 최대 영토는
전국시대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침공하기 전의
고조선 전성기 시절이 고조선 최대 영토로 알려져 있다

수구리 2024-10-04 07:31:21
■■ ■ 반도사관(식민사관)의 출발점은
삼국지 위서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의 해海의 틀린 해석이 반도사관(식민사관)의 출발점

■ 삼국지 위서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의 삼한의 위치는 "(三)韓 東西以海爲限"
1) 삼국지 위서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에 낙랑군 대방군과 예 삼한 고구려 동옥저 등
고조선 열국들의 상대위치와, 영토 크기 및 지형적인 특성이 있다

2) 고대 중국인은 큰 강이나 큰호수를 해(海)로 표현했다(바다도 해海라고 했지만)
특히 하북성 중남부의 북쪽으로 흐르는 춘추시대 고대 황하를 사마천 사기에서 해(海)라고 했다

鳥夷皮服 夾右碣石 入于海 (集解)徐廣曰 : 海 一作河
조이의 특산품은 짐승가죽 옷인데,
갈석산을 오른쪽(서쪽)으로 끼고 황하(해海)를 통해 운송되었다

다중인격 2024-09-02 09:45:01
요리조리 미꾸라지 이형우씨//

아무 증거도 못 대면서 낙랑교치가 팩트라고 호언장담하는 당신에게
최근에 접한 낙랑군 관련 기사들 중 최고의 걸작을 추천합니다.

<[한사군을 찾아서 ⑭] 낙랑군 교치설은 변종 식민사관>이라는 고대사 연구 칼럼인데
굿모닝충청의 조하준 기자가 낙랑교치설은 변종 식민사관으로 완전한 사기라고 합니다.

양심과 눈이 있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일반 상식이지요
앞으로 낙랑교치설 떠드는 놈들은 싹 다 사기협잡꾼 취급해도 되겠군요

다중인격 2024-09-01 08:21:13
도리뱅뱅이 이형우씨//

<교치설이 사기로 판명났다는 거짓말을 예사로 하네요>?????

사기치는 쪽은 당신 아닌지 당신 양심에 한번 물어 보시지?
당신이 분명히 교치 사실을 기록한 기사가 문헌에 나와 있다고 했죠?

그래서 내가 말했죠
<어떤 문헌 어느 챕터 몇번째 쪽에 나와 있는지 어디 한번 말해 보쇼>

교치 사실을 기록한 책이 어느 책인지 대답 못하는 놈이 사기꾼 아닌가?
왜 자꾸 말만 뱅뱅 돌리면서 남탓을 하쇼 사기는 자기가 쳐 놓고 ㅉㅉㅉ
정 분하면 교치 기록 된 책을 밝히라고 글쎄!

수구리 2024-09-01 06:46:37
■ 지금의 갈석산이 고대 갈석산인가?
1) 하북성 북동부의 창려현(昌黎縣)의 지금의 갈석산은 고대 갈석산이 될 수 없다.

지금의 갈석산이 고대 갈선산이 아닌 근거는

-. 사마천사기 화식열전과 한서지리지에
전국시대 연나라 도성 계가 발해과 갈석산 사이(발갈지간)의 도회지이니
갈석산 동쪽에 전국시대 연나라 도성 계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갈석산은 발해만 부근이기에 전국시대 연나라 도성 계 서쪽이 아니다

-. 당나라 학자 사마정이 「사기색은 」에서
"(우)북평군 여성현 서남쪽에 갈석산이 있고, 요서군 임유현 남쪽에 갈석산이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갈석산 동북쪽인 진황도시가 우북평군이 되고, 갈석산 북쪽/연산산맥 북쪽이 요서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