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9 12:20 (목)
인생수업
인생수업
  • 경남매일
  • 승인 2024.08.11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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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체감온도가 40도에 육박하는 복더위에 외출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독서 삼매경에 빠지는 게 제일 좋은 피서법이다. 열흘 정도 지나 처서가 돼야 비로소 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감돌아 불볕더위가 물러난다. 계절의 변화는 자연의 위대한 섭리이다. 간사한 인간은 폭염 같은 자연현상을 자초해 놓고 복더위만 탓한다. 은퇴 후 하던 대학 강사 노릇도 5년 전에 끝냈다. 하고 싶은 공부를 시작한 후엔 거의 모든 단체 활동을 중단했다. 그런 단체에 나가 이러쿵저러쿵 관여하는 게 나이 든 사람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노인이 되면 양기가 입으로 올라와 쓸데없는 말로 조직생활에서 분란만 일으켜 꼰대 취급받기 일쑤다. 필자보다 연장자 되는 분들의 노욕과 불통을 지켜보면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꼈다. 허욕과 권위의식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학식 유무에 상관없이 엄존한다. 나이깨나 먹은 자칭 지성이라는 사람의 언행이 몰상식하면 어른 대접받긴 글렸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영물(靈物)이 된다고 한다. 나이 탓하며 꿈도 희망도 없이 허송세월하는 노년은 죽은 인생이나 마찬가지다. 나름대로 보람찬 인생 이모작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나이가 들어 굳어진 사고방식을 유연하게 하지 않으면 꼴통 신세를 면치 못한다. 광속의 시대 흐름에 잘 대응하지 못하는 노인들은 적응성의 위기감을 무시로 느끼게 된다. MZ세대와 우리 같은 구세대의 사고방식에는 엄청난 괴리감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내가 어른입네 하고 기 세우다간 망신살이 뻗친다. 버스 간에서 노약자석에 버티고 앉은 학생 보고 '어이 학생 좀 일어나' 했다간 노추 신세 못 면한다. 웬만하면 그냥 서서 가는 게 오히려 속 편하고 좋다. 동방예의지국은 이제 케케묵은 고릿적 얘기에 불과할 따름이다. 오히려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의 온갖 추태를 경멸하며 역겨워한다.

손자나 보아야 할 노인이 어떤 조직의 윗자리에 연연한 채 노욕을 부리면 자기 스스로 무덤을 파는 추한 꼴이 되기 마련이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지난 삶을 성찰하는 인생수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얼마 전 서점에 주문한 책을 찾으러 갔다가 눈에 띄는 신간이 있어서 한 권 샀다. 미국의 저명 주간지인 뉴스위크(News Week)지 선임편집장인 존 릴런드가 쓴 <만일 나에게 단 한 번의 아침이 남아 있다면>이라는 책이었다.-오늘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들-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제목만 보아도 우리 같은 노인 세대가 읽어야 할 책이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여섯 명의 80~90대 노인을 선정해 아주 특별한 심층 면접을 통해서 그들의 일상을 밀착 취재해 실었다. 1부에는 첫 만남의 과정을, 2부에는 여섯 고령자의 개별적인 삶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책의 서두에 '내 삶에는 어떤 내일이 올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자신을 스스로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우리 인생은 남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주어진 생명이기 때문에 내 인생을 사는 것이다. 그 인생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아내가, 남편이, 부모가, 자식이, 친구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고, 자식들이 출세했다고, 아내가 빼어난 미인이라고, 남편이 출세했다고, 친구가 많다고 결코 내가 행복한 것은 아니다.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껴야 비로소 행복한 것이다.

잉꼬부부라던 남녀가 왜 30년을 살고 나서 황혼이혼을 하고, 수천 억의 유산을 상속받은 사람이 왜 갑자기 불행해지는가. 그런 행복의 독립변수들은 내가 만족감을 느끼는 행복지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여섯 고령자들을 상대로 한 심층 인터뷰를 통해서 저자 자신이 체험한 '인생수업'에 대해 여러 가지 유의미한 결론을 내렸다. "노인들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보고 느끼는 것보다 더 충만하고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우리는 주로 나빠지기만 하는 일상의 변화에 포커스를 맞추지만 그들은 그보다 더 길게 보며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노년에 대해서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가까이에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니 우리가 보던 것과는 달랐다. 그들은 유쾌하게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노인에 대한 일반사회의 통념과 편견은 그들의 삶을 마치 죽은 삶인 것처럼 잘못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나이가 들어 신체적 정신적 인지기능의 저하로 그 역할이 축소되었을 뿐이다.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저자는 여섯 노인들의 삶에 대한 관찰을 통해 행복, 목적, 만족, 우정, 아름다움, 사랑과 같은 인생의 좋은 것들은 내내 그들의 삶 속에 그대로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여섯 노인들의 삶에서 저자가 경험한 '인생수업'은 바로 자신이 늙었다고 남은 생을 회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노인답게 가치 있는 일을 계속하라는 것이다. '인생수업'은 한 개인이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과제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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