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육의 중요한 목적이 정체성을 함양하는 데 있다. 정체성이 확립되면 자신이 속한 국가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애국자가 된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정체성이 결여된 한국인이 되도록 식민사관에 의거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하였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을 영구히 식민지로 하기 위해 식민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편찬하였다. 식민사학의 요체는 민족말살을 위한 단군말살과 단군조선 부정, 북부는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낙랑군 평양설, 남부는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임나일본부설, 그리고 만주와 중국 요서지역까지 있었던 역사강역을 한반도 안으로 축소한 반도사관 등이다.
이것이 독립된 대한민국이 된 뒤에도 제대로 극복되지 못하고 고대사학계에 이어져서 식민사학 유풍의 역사교육을 하였다. 그 연유는 정체성을 지니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역사연구를 하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일제강점기에 순국을 하거나 6·25 전쟁 시 납북되었다. 강단사학은 조선사편수회에서 식민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난도질했던 이병도와 신석호가 장악했다.
식민사학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 동북아역사지도 사태였다. 고대사학자 60여 명이 47억여 원의 국고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처하기 위하여 만든 동북아역사지도에 조조의 위나라 강역이 경기도까지 그려져 있고 독도는 지도에 나타나지 않았다. 윤관의 9성과 고려 국경 등을 잘못 그렸으며 독립운동사도 반영되지 않았다. 지도를 그리는데 지도 전문가는 한 명도 참여시키지 않고 독도를 의도적으로 빼고 식민사관 학설에 따라서 제작하였다.
고대사학자 60여 명 중 아무도 독도가 없는 지도와 조조의 위나라 강역이 경기도까지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바로잡지 않았다. 그래서 국민들의 지탄으로 국회에 동북아역사특위가 구성되어 중국의 동북공정에 협조한 이 지도 제작을 막았다. 이 때 앞장서서 동북아역사지도를 제작해야 한다고 하면서 지도제작을 막았던 국회의원들과 민족사학계를 비난한 기경량은 시간강사에서 얼마 뒤 정식 대학교수가 되었다.
기경량은 식민사학 유풍의 고대사학계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사이비역사학자라고 한다. 기경량은 국민들이 분노하여 2번의 방영으로 하차한 조선구마사를 옹호하여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조는 과장되었다고 한다. 우리 역사를 비하하는 것으로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중국과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이 좋아할 주장으로 정체성이 결여된 견강부회를 한다.
반도사관의 주창자로 이병도의 스승인 식민사학자 쓰다 쏘기치를 양심적인 학자라고 하면서 민족주의 사학자 정인보를 비아냥 된다. 정인보는 당대 최고의 국학자로 4대 국경절 노래 작사를 한 분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분이다. 기경량이 또 김해시史와 전라도천년史 등이 식민사관에 의하여 쓰여진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사이비역사학자라고 주장한다.
식민사관에 의하여 쓰여진 <김해시사> '가야사'를 비판하면 사이비 역사학자가 되고, 테러리스트가 된다는 것이다. 이 기자는 제목 뽑는 것은 언론사가 사실에 기반해 뽑는다고 한다. 자기 책임을 언론사에 미루면서 기경량의 주관적인 주장을 사실이라고 한다. 주관적인 판단으로 상대에게 모욕을 주거나 명예훼손을 하면 처벌을 받는다. 그래서 시민단체에서 법적인 조치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이 기경량의 주장에 따라 '김해市史, 사이비 역사학자에 테러당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기자도 있다.
동북아역사지도를 제작해야 한다고 주창하면서, 동북아역사지도의 문제점을 앞장서 지적한 이덕일 박사를 비난한 사람들은 얼마 후 시간강사에서 정식 대학교수가 되거나 역사 관련 국가기관에 취업이 되었다. 동북아역사지도 독도 누락의 책임이 있는 임기환이 'KBS 역사저널 그날'에 계속 출연하자 시청자들이 출연시키지 마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
식민사학 카르텔에 의하여 동북아역사지도 예산 47억 원은 거의 환수되지 않았다. 식민사학 카르텔이 극복되어야 역사학이 제대로 발전할 수 있다.
이들 여러 군에는 산천 곧 산과 강이 여럿 있습니다. 논란이 있는 산천을 제외하고 이때까지 이견이 거의 없는 지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의무려산입니다. 이 의무려산은 요동군 무려현에 있습니다. 난하는 의무려산 서쪽으로 한참 떨어진 거리에 있습니다. 요동군에서 동쪽으로 1,000리 더 가야 하는 낙랑군이 도리어 요동군에서 서쪽으로 한참 거리에 있는 난하 주변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덕일은 낙랑군이 하북성에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의무려산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