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6 08:16 (월)
불안이 우리를 망상 속으로 밀어넣죠
불안이 우리를 망상 속으로 밀어넣죠
  • 하영란 기자
  • 승인 2024.08.07 23: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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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통해 삶을 묻다 30
박판식의 시 '생활이라는 망상'

혼자 하는 사랑이 설령 고문이라도
불안, 망상으로 데려가지 않도록
박판식 시인
박판식 시인

이 세상은 '항상함'이 없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아는 것을 그대로 적용하며 사는 것은 아니다. 삶이 무상하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주변의 사람도, 사랑도, 삶도 변한다. 도만 말하면서 살 수는 없다. 도는 도처에 있지만 우리는 생활 속에 산다. 생활은 온갖 삶의 산실이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찌질하게 살아간다. 멋지게 사는 사람 역시도 삶의 비극 위에 희극의 옷을 입히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변 관계가 좋다고 해도 그 관계가 계속 좋은 것도 아니고, 먹고 사는 문제 역시도 만만찮다. 산다는 것은 하루 하루를 견디며 버텨내는 것이다. 먹고 사는 기본적인 것이 흔들리면, 불안이 더 엄습한다. 아무리 불안을 쫓아내도 스토커처럼 따라온다. 인간이 생각을 하는 한 불안하다. 떨쳐낼 수 없는 불안이 망상으로 인도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박판식의 시 '생활이라는 망상'에서 시적 화자는 불안을 지켜보고 있다. 불안이 가득한 마음은 전화기를 들었다 놓기도 하고, 불안한 마음에 삶이 진정 무엇인가를 깊이 탐구해 본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기나 한지 확인해 본다. 불안한 마음이, 갇힌 울타리를 넘고 싶어서 내가 살아있는지 살짝 포크로 찍어보기는 하는 것이다.

불안이 내 삶을 잠식하기 전에, 불안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그 불안이 망상까지는 만들어내지 않도록 나를 삶의 현장 속에 놓고, 살아있음을 확인하기를.

'혼자 하는 사랑은 고문이다' 그래도 불안이 나를 사랑하지는 않도록, 내가 불안을 사랑하지는 않도록 이 한여름의 볕 속에 불안을 말릴 수 있을까. 박판식의 시 '생활이라는 망상'을 조용히 읖조린다면 불안이 무상한 하늘의 깊이에 놀랄 수도 있을 것이다.

 

생활이라는 망상

 

 

바람은 높은 곳에서 불고 있다

굴뚝과 구름이 2월의 하늘을 놓고 지루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커튼 뒤에서 점심 뷔페는 저녁 손님을 맞으려고

고깃집으로 변신 중이고

팔 분 정도 참았다가

불안은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놓는다

 

아주 중요한 순간처럼 구름이 천천히 속력을 줄여

횡단보다 앞에 멈춰선다

이 세상이 누구의 기막힌 착상인지 생각해보다가 불안은

무상한 하늘의 깊이에 놀란다

 

사 분의 일쯤 뜯겨진 비닐봉투 속에서

슬픔과 절망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쏟아진다

스무 번쯤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동안 큰 가방 같은

창문이 쓸모없는 풍경을 방안으로 끌어들인다

 

혼자 하는 사랑은 고문이다

혼자 먹을 음식을 식탁보 위에 충분히 펼쳐 놓으며

불안은 이 중요한 문제에 관해 골똘히 생각해보다가

통증이 있나 없나 손등을 포크로 살짝 찍어본다

- 박판식 시집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에서(문학동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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