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0 06:40 (금)
자기 목소리 낼 줄 아는 큰사람 만나봐요
자기 목소리 낼 줄 아는 큰사람 만나봐요
  • 하영란 기자
  • 승인 2024.07.25 2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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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넘기기 25
은유 인터뷰집 '크게 그린 사람'
세상에 지지 않고 사는 얘기 통해
크게 살아가는 진짜 삶 들여다보기
은유 인터뷰집 '크게 그린 사람' 책표지.
은유 인터뷰집 '크게 그린 사람' 책표지.

흩어져 있는 것을 모아서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발품을 팔아 다양한 곳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목소리를 듣고 기록으로 남길 때, 그 기록은 비로소 역사가 된다.

역사의 자료로 증거를 남기는 사람이 될 때, 힘없는 개인은 힘을 가진 존재로 서게 된다. 그냥 목소리만 낼 때와 저자로서 목소리를 낼 때의 차이점은 분명히 있다. 혼자서 목소리를 낼 때는 들은 척도 하지 않다가 체계적인 기록의 책을 냈을 때는 참고하고 귀를 기울인다.

기록의 힘은 중요하다. 특히 낮은 자의 목소리들은 기록하지 않으면 공중에 흩어진다. 억울한 일, 힘든 일, 불합리한 일들을 기록하며 문제점들을 다같이 고민할 때 사회에 미미한 변화라도 가져올 수 있다.

주변의 것들을 기록하는 글을 쓰다 보면 공부하게 된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공부하고, 더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왜 생겼는지 나름의 분석과 사유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나름의 방향성도 짚어보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지지 않고 크게 살아가는 18인의 이야기를 그린 은유 인터뷰집 '크게 그린 사람'은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활어 같다. 언어가 살아 있다. 정제되고 체계화된 이론적인 책이 아니다. 현장에서 진짜 삶을 살고 있는 18인의 목소리가 심장으로 와서 바로 꽂힌다.

설득도 아니고 가르침도 아니다. 삶으로 말한다. 애써 고개 숙이는 가르침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삶 그 자체가 가르침으로 온다. 마치 온몸으로 대지 위를 기어가는 뱀과 같은 자세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귀 기울여 들을 부분을 짧게 몇 꼭지만 소개한다.

과학수사대 경찰 원도('경찰관 속으로'의 저자)는 '사망 2년 만에 발견된 사람도 있는데 2년이면 사람이 장판이랑 붙어요. 미라가 되다 못해 안 떨어지는 거죠. 징그럽다 생각하면 못 해요 남자 선배가 해준 말인데. '사건 현장에서 냄새 난다고 생각하지 마라. 흙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썩고 있는데 지금이라도 발견해서 장례 치르게 도와준다고 생각해라' 하셨죠. 고인의 안식 하나만 생각하고 해요. 경찰은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 모습을 잊지 않는 것, 현장 갔다 오면 눈물이 난다니까요.

영국의 그라피티 아티스트 뱅크시 작품 중에 '무지(ignorance)라는 액체가 든 플라스크를 두려움(fear)이라는 불로 데우면 혐오(hate)라는 액체가 추출되어 시험관 안으로 들어간다'는 내용이 있다. 작은 동네에서도 이편과 저편으로 나누어 두 개의 평행우주를 구축해 나가려는 인간 세상의 축도를 그려낸 김혜진 작가('불과 나의 자서전')는 혐오의 불씨가 애초에 '자신에 대한 무지'에서 영원하는 게 아닌지 묻고 있다.

이영문 국립정신건강센터장은 정신질환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정신질환이 영원하다는 것이죠. 한번 정신병은 영원한 정신병이라는 것, 아주 대표적인 편견입니다. 정신질환은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상태의 개념이거든요. 상태는 언제든지 바뀝니다. 우호적인 환경이 만들어지고 병 자체에서 오는 증상들을 잘 조절할 수 있으면 상태는 바뀌죠. 질병이 없는 상태가 계속 유지되면 잘 살 수 있죠.

신영전 한양대 의대 교수는 "의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옹호자"라는 사회의학 창시자 루돌프 비르효의 말을 신념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자신은 "남자에, 기득권 교수에, 편안한 정규직"이라는 존재 조건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 이 모순과 분열을 겪어내며 그는 좋은 의사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매 순간 질문하는 의사로 살아간다.

성소수자에 대한 선입견에 휩싸여 있거나 무지한 사람들은, 성소수자에게도 일상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 것 같아요. 언젠가 퀴어문화축제의 슬로건이 '당신 옆에 성소수자가 있다'였던 적이 있거든요. 김현 시인은 묻는다. '우리의 행복은 왜 늘 다른 취급을 받는가', '우리가 이룩한 것이 있다면 우리가 무너뜨린 것이 있지' 가장 애틋한 시 '우리의 불'(김현)에서 도드라지게 빛나는 이 시구는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문장처럼도 느껴진다. 사랑하는 일이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인간관계의 반목과 화해, 살아가는 일의 기쁨과 슬픔, 먹는 일의 즐거움과 비루함 같은 상승과 하강의 에너지가 교차하고 흘러가서 삶의 대양을 이룬다. 슬픔의 시간도 호시절이 된다.

은유의 책 '크게 되는 사람' 18인의 이야기 중에서 5인의 이야기를 아주 짧게 맛보고 책에서 생각할 만한 것을 꼽아봤다. 우리는 남의 마음을 알 수도 없다. 내가 겪지 않은 것은 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듣고 공감하고 생각함으로써, 이 현재라는 삶에서 타자를 소외시키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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