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6 15:10 (월)
생각을 벼릴 때 환영이 물러가죠
생각을 벼릴 때 환영이 물러가죠
  • 하영란 기자
  • 승인 2024.07.17 23: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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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통해 삶을 묻다 27
박라연의 시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천근만근 근심 나를 덮칠 때
생각 벼림 통해 피할 수 있어
박라연 시인
박라연 시인

내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둘러싼 구조적인 것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늘 변하고 있는 내 몸마저도 내가 아니라고 한다면 내 존재의 증명은 어떤 방식으로 할 수 있을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존재의 증명을 생각으로 한다는 것이 맞는 것일까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진정한 한 독립된 주체로 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있어 온 관습과 도덕의 명령이 아닌 나 스스로 생각해서 살아가야,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를 고민하게 한다. 나의 생각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또 어디서 보고 들은 것들의 구성물이라고 해도, 또 그것을 생각하면서 이것이 정말 나의 생각인가를 묻고 또 묻게 된다.

도대체 생각하는 일이 무엇이지, 내 삶과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를 고민하는 사람에게 박라연의 시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이 잔잔한 호수처럼 다가올 수도 있겠다.

한 인간이 진정한 독립된 삶을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우리는 생각하는 주체로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대한 세계의 흐름에 휩쓸리고 주입된 세계관으로, 떠도는 정보 속에 빠져 살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삶을 살다가 허망하게 갈 수도 있다. 생각은 하지만 깨어있는 생각이 아닌 망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수가 허다하다.

생각을 벼리고 벼릴 때 나를 덮고 있던 혼미한 것들이 홀가분하게 벗겨지는 일이 가능할까. 있다고 해도 그것은 찰나적일까.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물방울처럼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사라졌지만 순간의 각인과 대오가 영원의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에게 물어본다면 뭐라고 대답을 할까 궁금하다.

천근만근 근심을 가진 애인은 무엇일까? 생각으로 짓는 망상이 아닐까. 망상을 애인처럼 끼고 살아가는 우리는 수없이 세계를 만들고 부수며 환영 속에서 살아간다. 망상에서 나오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생각을 벼리는 것일까. 천근만근의 근심을 가진 애인은 무얼 했지? 박라연의 시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을 반복해서 읽다 보면 환하게 밝아 오는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을 벼리면서 읽는다면 말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이 세상 모든 눈동자가 옛날을 모셔와도
마시고 만져지면서 닳아지는 물질이
이제 저는 아니랍니다

생각하는 일만 허용되는 색깔로 살게 되었습니다
천근만근 애인의 근심만은 입에 물고 물속으로
쿵 눈빛마저 물에 감기어져 사라질 태세입니다

그림자 손이 아무리 길게 늘어나도
ㅉ이 ㅃ으로 ㄴ이 ㅁ으로 쳐질 때 있습니다
한계령에 낙산사 백사장에 우리 함께 가요,라고
말할 뻔했을 뿐입니다

생각만으로 벼린 색이 되는 날이 제겐 있었어요
그림자 스스로 숨 거두어 가주던 그날
배고픈 정신의 찌
덥석 물어주는 거대한 물방울의 색깔을 보았습니다

-박라연 시집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에서(문학과지성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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