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는 행복의 적이라 했다. 부질없이 남과 비교를 하다보면 자신이 초라해지기 때문이다. 열등감이 밀려오면 자존감은 바닥을 치기 마련이다. 그러니 당연히 행복해질 수가 없다. 그럼에도 경우에 따라선 이 비교가 또 다른 행복을 만들어 내는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열등의식 속에는 또 다른 '순기능'이 숨어있다. 아이러니지만 콤플렉스의 또 다른 가치요 의미가 아닐 수 없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한 명 있다. 유해진이다. 그의 성공은 외모 콤플렉스로 비롯된 것이라 했다. 고백에 따르면, 그는 사춘기 때 못생긴 얼굴 때문에 맘고생이 많았다. 이 외모 콤플렉스를 이겨내려고 피나게 노력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오늘의 그다. "제 얼굴이 좀 많이 돌출되었잖아요. 눈도 찢어지고. 하지만 제 삶의 에너지원 중의 하나가 못생긴 이 외모 콤플렉스였어요. 웃는 것 하나만 해도 그래요. 멋있게 웃으려고 하기보단 못생겼지만 있는 그대로 진실이 드러나도록 웃고자 노력했어요. 더 과장되게, 더 통쾌하게". 오늘의 유해진, 얼굴이 재산이다.
지난날 내게도 콤플렉스가 하나 있었다. 목소리였다. 친구들보다 목소리가 너무 가늘어 남자답지가 않았다. 지금도 많이 가늘지만 변성기 이전에는 더더욱 심했다. 고등학교 때 펜팔로만 2년을 사귀던 여학생도 어느 날 내 전화 목소리를 듣고선 절교를 했고, 요즘도 간혹 이런 전화를 받곤 한다. "사모님, 차 좀 빼 주이소".
나는 대학 때 연극 동아리에서 연극을 배웠다. 이유는 다른 것도 있었지만 더 몰두하려고 노력했던 건 목소리 음색과 어투를 한 번 바꿔보려는 동기도 이유 중의 하나였다. 지금은 마이크를 들고 강의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외부 강의를 나가면 간혹 내 목소리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다. "식사할 때와 강의할 때의 목소리가 많이 다르군요. 어찌 그럴 수가 있지요?" 목소리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요, 고민하고 방황하던 끝에 만들어진 '강의용' 말투다. 콤플렉스의 순기능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그 순기능으로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날 버린 마산여고 그 여학생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글씨가 참 예뻤었는데. 어쩜 그 여학생이 버려주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참으로 감사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