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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五臟)의 식중독을 제거하는 작약장(芍藥醬)
오장(五臟)의 식중독을 제거하는 작약장(芍藥醬)
  • 경남매일
  • 승인 2024.07.09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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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얼굴 전체가 환하게 웃는 웃음을 함박웃음이라고 하고 5월이면 온 집안이 환할 정도로 탐스럽게 피는 함박꽃을 작약(芍藥)이라 한다.

작약(芍藥)은 중국 진(晉)나라 때, 이미 화초로서 가꾸어져 꽃세상의 '화왕(花王)'인 모란 다음으로 아름다운 꽃이라 하여 재상(宰相)인 '화상(花相)'이라 칭하였다.

반드시 '화왕(花王)'인 모란이 진 후에야 비로소 '화상(花相)'인 작약(芍藥)이 피기 시작한다. 작약(芍藥)은 절대로 '화왕(花王)'인 모란보다 앞서 피지 않는다.

'화왕(花王)'인 모란(木壇)은 나무이고 함박꽃이라 불리는 작약(芍藥)은 풀 즉 '숙근초'라는 점이 다르다.

'고려사(高麗史)'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23년(1297년) 5월에 노국공주(魯國公主)는 수령궁 향각 뜰을 거닐다가 적작약이 만발한 것을 보고 시녀에게 꽃 한송이를 꺾어 오라고 했다. 그 꽃을 받은 공주는 한참 동안 감상하다가 결국 흐느껴 울고 말았다. 공주는 멀리 떠나온 고국에도 한창 피어 있을 적작약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 뒤로 공주는 몸 저 자리에 눕게 되고 끝내는 숨지고 말았다고 한다.

작약(芍藥)의 크고 탐스러운 꽃은 마음의 약(藥)이 되고, 그 뿌리는 아픈 육신을 고쳐주는 약(藥)이 되는 아름다운 약초(藥草)다. 중국의 문헌 자료를 인용하였지만 조선시대 함박꽃의 뿌리로 작약장(芍藥醬)을 담은 기록이 보인다.

조선 중기 실학자 지봉(芝峰) 이수광(1563~1628)이 1614년에 펴낸 '지봉유설(芝峰類說)' 작약(芍藥)에 '七發曰芍藥之醬(칠발왈작약지장). 子虛賦曰(자허부왈). 芍藥之和(작약지화). 具而後御之(구이후어지). 按芍藥根(안작약근). 主和五藏毒氣(주화오장독기). 故合於蘭桂五味(고합어란계오미). 韋昭曰(위소왈). 制食之毒者(제식지독자). 莫良於芍藥(막양어작약). 故獨得藥之名耳(고독득약지명이)'라고 했는데, 이를 번역하면 <칠발(七發)'에 보면, 작약(芍藥)의 장(醬)이라 했고, '자허부(子虛賦)'에는, 작약(芍藥)이 조화(調和)해 주는 것은 여러 가지가 갖추어진 뒤에 바라야 한다>라고 했다. 상고하건대 작약(芍藥)의 뿌리는 주로 오장(五臟)을 조화(調和)시켜 독기(毒氣)를 물리치기 때문에 난주오미(柱五味)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위소(韋昭)'는 말하기를, 음식의 독을 없애는 데는 작약(芍藥)보다 좋은 것이 없다. 그런 때문에 유독 약(藥)자의 이름을 얻은 것이다>라고 했다.

지봉(芝峰)은 전한 초기 매승(枚乘, ? ~기원전 140)이 쓴 '칠발(七發)'의 작약장(芍藥醬)을 인용해 언급하였으며, 병산(屛山) 이관명(李觀命, 1661~1733)은 '병산집(屛山集)' 제1권 시 주에 '작약꽃이 무성할 때 그 뿌리로 오장(五臟)의 식중독을 제거하는데, 예로부터 작약으로 만든 장(醬)에다가 난과 계수나무의 오미(五味)를 섞어 여러 음식에 넣었기에 작약을 '오미의 조화<五味之和>'라고 일컬었다. 서한(西漢)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은 '상림부(上林賦)' 주(注)라고 되어 있다.

조선후기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학문과 사상을 집대성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아언각비(雅言覺非) 1권 장(醬)에도 '작약장(芍藥醬)'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작약장(芍藥醬)'은 19세기 이후 문헌(文獻)은 물론 실제 장(醬)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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