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린 시절 부산에서 겪었던 6·25전쟁은 처참했다. 밤마다 들려오는 대포소리, 집 가까이 있는 야전병원의 천막에서 흘러나오는 비명소리 등 온갖 고통스러운 소리들은 끊이질 않았다. 학교는 군병원이 됐고, 나는 공부할 곳이 없어 어두컴컴한 창고 속 책상에서 글자를 읽었다.
오후가 돼 거리로 나가보면 수많은 유엔군이 부산항으로 다가왔다. 그러면 나는 태극기를 들고 그들을 맞으며 열심히 만세를 외쳤다. 처음에는 터키군, 다음은 에티오피아군이 들어왔다. 내가 태극기를 흔들고 큰 소리로 외치면 그들은 답례로 사탕을 던져줬다.
당시 광복동 용두산 공원 일대, 범일동 거리, 산기슭마다 피난민촌은 빈틈없이 세워졌다. 도시에는 하루 한 끼 먹는 것을 걱정하는 걸인이 가득했고, 그들을 위로하는 이들은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마구 흘렸다. 그 시기 내가 알던 세상은 그처럼 각박한 곳이었으나, 그래도 그때 그 뜨거운 여름처럼 간직했던 내 마음속 어떤 희망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민족의 회한과 상흔이 서렸던 당시의 부산 광복동 거리는 깊은 상처 속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미묘한 고통이 스며든 추억의 장소다.
이와 관련해 기억나는 한 사람이 있다. 부산의 보훈 문화를 남몰래 발전시킨 문상림 여사(한국꽃꽂이협회 회장)다. 그는 해군 출신 남편을 뒀다. 그래서 6월이 되면 부산 사람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960년 6월 25일 그는 16개국의 고마운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부산의 그 누구보다 먼저 꽃다발과 끓인 차를 들고 용호동 유엔묘지공원을 찾았다. 이름도 모르고 만난 적도 없이 한국의 자유를 위해 산화한 영령들에게 꽃과 차를 바쳤다. 이후 그는 6월 25일이 되면 매년 용호동 유엔묘지공원에서 헌화·헌다를 했다. 그의 여정에 필자도 종종 동행했었다.
2020년을 전후해 코로나로 인해 참배가 금지되기 전까지 나는 그의 헌화·헌다에 동참했다. 코로나로 인해 한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고, 최근 그의 소식이 궁금해 지인에게 물으니 지인은 가만히 눈물짓고 답하지 못했다. 이윽고 하는 말이 "선생님은 좋은 일은 남에게 알리고 자랑하라고 하셨지만 좋지 못한 일은 함구하라 하셨습니다"라고 했다. 알고 보니 최근 들어 치매 증세가 악화돼 투병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처럼 씩씩한 여사가 세월과 병이라는 피할 수 없는 숙명에 고통받고 있으니 슬픔을 금할 수가 없다.
목숨이나 물질을 바치는 것만이 나라를 위하는 길은 아니다. 그처럼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청춘들의 넋을 남몰래 기리는 것 또한 애국이다.
한국을 지켜준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은 우리들, 또 우리에게 은혜를 준 그들을 묵묵히 기렸던 문상림 회장, 보훈으로서 '부산의 꽃'을 가꾸었던 그를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이 좋은 날에 밖에서는 비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