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의 '서사의 위기'
나만의 맥락·이야기 실종된 삶
'사느냐, 이야기하느냐' 회복 강조
우리는 삶이란 것을 제대로 살고 있기는 한 것일까? 삶을 떠받치는 힘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고민을 하기도 전에 수많은 정보에 노출돼 있다. 정보는 지식이 아니다. 부유하는 파편들이다. 지식은 일정한 체계를 지니고 있다. 일정한 체계를 지니기 위해서 수많은 정보들을 범주로 나누고 일반화하는 작업을 거친다. 지식도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일 경우에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지식을 사유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필터 없이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방향성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더 많이 올려라.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더 많이 보여라. 삶의 이야기는 광고처럼 소비되고 있다. 이때 잠시 멈춰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적어도 이 스마트한 시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현실인식이 필요하다. 현실인식을 통해 대안을 모색한다면 한병철의 책 '서사의 위기'를 탐독하길 권한다.
이 책의 역자 최지수는 역자 서문에서 '지금 우리는 스마트한 지배에 예속돼 있다. 억압도, 저항도 없이 삶을 게시하고 공유하고 좋아하도록 지배당한다. 새롭고 자극적인 뉴스가 넘쳐나는 시대, 이슈에서 이슈로 빠르게 이동하는 사람들, 스스로 자기 존재를 정보로 전락시키는 사회에서 개인은 각자의 이야기, 즉 서사를 잃고 우연성에 휩싸인 채 폭풍우 한가운데서 부유한다' 말한다.
우리는 과연 어떤 서사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가? 역자 최지수는 '서사는 나만의 맥락과 이야기, 삶 그 자체다. 나의 저 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기에 방향성을 띤다'고 말한다. 진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나만의 맥락이 중요하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나 자신의 맥락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고민해 볼일이다.
한병철은 '스마트한 지배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의견, 필요, 선호를 소통하라고, 삶을 서술하라고, 게시하라고, 공유하라고, 링크를 걸라고 요구한다. 이때 자유는 커녕 철저히 혹사된다. 자유가 결국 통제와 제어로 전복되는 것이다'라고 한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스스로를 지배의 흐름에 예속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병철은 또 '서사의 위기인 근대의 실존적 위기는 삶과 이야기가 산산이 와해된다는 데서 발생한다. 이 위기의 문제는 '사느냐 아니면 이야기하느냐'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디지털화된 후기 근대에 우리는 끊임없이 게시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하면서 벌거벗은, 공허해진 삶의 의미를 모르는 척한다. 소통 소음과 정보 소음은 삶이 불안한 공허를 드러내지 못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위기는 '사느냐, 게시하느냐'가 된 데 있다. 내면의 공허가 셀카 중독으로 이어진 것이다. '나'에게는 안정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의미 제공이 결여돼 있다'는 진단을 통해 셀카는 내면의 공허에 직면한 내가 자기 복제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한병철은 '사진은 기억 이미지와 달리 서사적 내면성이 없다. 사진은 주어진 것을 내면화하지 않은 채로 모사한다. 사진은 의도하는 바가 없다. 반면에 서사로서의 기억은 단순한 시공간적 연속체가 아니다'고 한다. 사진이 기록의 의미는 가지지만 진정한 서사는 가지지 못함을 비판적으로 이야기한다. 찍고 또 찍고, 찍음으로써 기록하고, 올리고, 보여주는 스마트한 시대에 한 번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작가의 말이 전적으로 다 옳다고 할 수는 없으나 충분히 숙고해볼만한 가치는 있다.
철학에 대해서도 한병철은 '철학이 자신을 학문, 심지어 정확한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순간에 철학의 쇠락이 시작된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본래의 서사적 성질을 부정한다. 이로 인해 언어가 박탈된다. 그러면 철학은 침묵한다. 우리는 사유가 결국 그 자체로 이야기라는 것과 이야기의 단계를 거쳐 나아가는 것임을 지각해야 한다.'고 하며 이야기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또 작가는 '모든 슬픔은 이야기에 담거나 이야기로 해낼 수 있다면 견딜 수 있다'고 한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한다.
작가는 모모의 이야기를 하면서 경청의 중요성을 이야기 한다. 경청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사람이다. 경청은 상대에게 이야기할 영감을 주고 이야기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을 소중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심지어 사랑받는다고까지 느끼는 공명의 공간을 연다고 한다. 또, 신자유주의 체제의 기초가 되는 서사는 공동체 형성을 방해하며, 신자유주의적 성과 서사는 모든 사람을 스스로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되게 한다고 하며 성과 서사를 비판한다. 성과 서사는 응집성과 연대, 공감까지 해체한다고 말한다.
한병철은 시인이자 철학자인 노발리스의 말을 빌려온다. "시는 모든 개인을 나머지 전체와의 독특한 연결을 통해 고양시키고, 세계 가족인 아름다운 사회, 즉 우주의 아름다운 가정을 만든다··· 개인은 전체에 살고 전체는 개인에 산다. 시를 통해 최고 수준의 교감과 공동 행동 양상이 생성된다"
이 스마트한 시대에, 파편화되고 사물화된 개인이 머물 곳은 어디인가?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파편화 작업에 아무런 거부감 없이 동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못난 변명을 하면서 말이다. 뉴스의 정보, SNS의 정보 속에서 서사를 가진 삶을 고민한다면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를 깊게 들여다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