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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시사>는 어떤 역사관으로 집필되었는가
<김해시사>는 어떤 역사관으로 집필되었는가
  • 경남매일
  • 승인 2024.06.2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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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김해근대역사위원회 위원장, 전 영운초등학교장
이헌동 김해근대역사위원회 위원장,
전 영운초등학교장

<김해시사(金海市史)> '가야사' 29쪽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금관국의 이름은 세 군데 나오는데, 첫 번째는 탈해이사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큰 알의 상태로 금관국 해변에 닿았었다는 설화 속에 나온다. 두 번째는 파사이사금 때에 금관국의 수로왕이 신라에 와서 주변 소국들의 분쟁 해결에 도움을 주었다는 설화 속에 등장한다. 세 번째는 532년(법흥왕19)에 금관국왕 김구해가 신라에 항복했다는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는 수로가 나라를 열어 '가야'라고 하였는데, 후에 고쳐서 '금관국'으로 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는 글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서기 102년) 가을 8월 읍집벌국과 실직곡국이 경계를 다투다가 왕에게 찾아와 판결해 줄것을 요청하였다. 난처하여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이 많은 나이에 지혜와 식견이 많다고 생각되어 불러 문의하였다. 수로왕이 그 땅은 읍집벌국 것이라고 하였다. 6부에 명하여 수로왕을 대접하게 하였다. 5부는 이찬이 왔으나 한기부는 지위 낮은 자를 보내왔다. 수로왕이 무례한 한기부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돌아갔다." 이 기사가 설화일까?

이 역사사실을 설화라고 하는 사람들은 김수로왕의 서기 42년 가야건국을 부인한다. 이들은 2세기나 3세기 후반에 김해의 가야가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므로 앞선 시기인 김수로왕 기사는 설화라고 한다. <김해시사>에서 많이 인용하는 김태식이 그러하다. 이런 역사관으로 <김해시사> '가야사'를 편찬한 것이 곳곳에 있다.

김태식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제 7권 '가야사 인식의 제 문제'에서 가야사보다 임나사를 먼저 논하면서 "아유카이 후사노신이 방대한 문헌고증을 통하여 임나의 지명 비정 범위를 경상북도와 충청도까지 확장시켜서 임나는 경주 부근과 부여와 공주 일대를 제외한 한반도 남부 전역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것은 일본서기에 왜의 한반도 내 지배 영역이었다고 상정된 임나의 범위를 넓혀 잡기 위해 그가 문헌 비교 및 언어학적 추단을 거듭함으로써 얻어진 연구결과였다고 여겨진다."고 서술하였다.

김태식이 칭송한 아유카이 후사노신은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낭인 깡패로 임나일본부가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창한 식민사학자다. 식민사학자를 숭상하는 김태식의 '김해의 가야가 임나'라는 역사인식이 <김해시사> '가야사' 곳곳에 나온다. 이런 역사관을 지닌 사람들이 <김해시사>의 '가야사'를 집필해도 되는 것일까?

<김해시사> '가야사' 30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기원전 2세기 이후의 김해지역에서는 세형동검, 청동삼각끌, 쇠도끼를 부장한 회현리패총의 합구식 옹관묘, 지내동 옹관묘, 세형동검과 검은간토기 목항아리가 수습된 내동 지석묘에 인접한 목관묘 추정 유구와 같은 것이 나타났다. 이 단계에서 청동기나 철기는 이들에 의하여 생산된 것이 아니라 후기 민무늬토기의 문화 기반에 단순히 추가되었을 뿐이다. 그러한 존재가 수로왕이 출현하기 이전 9간(九干)의 전신이었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 9간의 합의체와 같은 것이 있었고, 그들 사이에 초월적 지배자는 없어도 일정한 서열은 존재하였던 듯하다."

"이 단계에서 청동기나 철기는 이들에 의하여 생산된 것이 아니라 후기 민무늬토기의 문화 기반에 단순히 추가되었을 뿐이다."라고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 보면 "철이 나는데 한(漢), 예(濊), 왜(倭) 등지에서 이를 가져간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도 모두 쇠를 가지고 하여 마치 중국에서 돈을 가지고 쓰듯이 한다"는 기사가 있는데도 이런 글로서 변한과 가야에는 철기문화가 발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없게 한다.

"가야 유역에서 철기가 출현하는 것은 BC 4세기 부터다. 가야의 철 제품 품질이 중국보다 우수한 것은 양쪽의 끝부분에 탄소를 불어넣는 제련 공법인데, 이것은 고대 인도의 철 제련법과 같다고 한다. BC 1세기 김해 인근에서 철제품이 나온 유적지로는 창원 다호리 고분과 밀양 교동 고분이 있다. 다호리 고분에서는 철검, 쇠투겁창, 쇠꺽창, 쇠화살촉, 쇠도끼 등과 농기구인 따비와 낫 등 수많은 철제품이 출토 되었다.

밀양 교동 고분에서는 단조철부와 판상철부, 철착, 철겸, 철서 등의 공구류가 48점, 철검과 철모 등 무기류가 17점, 제의 용구인 'T'자형 철기가 2점 발굴되었다. 다호리 고분의 지도자급 묘인 1호분에서 붓 5자루와 손칼이 출토되었는데, 이 붓과 손칼은 연필과 지우개 같은 문방구 역할을 한 것으로 교역시 영수증 작성에 사용되었다. 교류와 교역이 가장 활발했던 김해지역의 지도자인 9간들도 글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김해시사>에는 이런 글이 서술되어야 한다. 식민사학자들이 주창한 임나가 가야라는 것을 추종한 역사관으로 쓰여진 가야사는 바른 역사관을 지닌 사람들이 다시 집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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