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1 10:14 (일)
열흘을 붉다 갈지라도… 충만한 몸부림
열흘을 붉다 갈지라도… 충만한 몸부림
  • 하영란 기자
  • 승인 2024.06.12 2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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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통해 삶을 묻다 23
권대웅 시인 '화무십일홍'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 삶이라도
간절함은 허무 건너는 최선
권대웅 시인
권대웅 시인

결국엔 모두 지고 만다. 진다고 해서 피지 않을 수 없다. 겨울을 뚫고 새싹이 돋고 또 꽃을 피워내야 한다. 그것이 삶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헤어질 운명이다. 시간 앞에서 무너진다. 시간이 삼켜버리는 것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그 누가 살다 간 여름일지라도 말이다.

간절함이 있기에 몸부림치듯 발악하듯 살아간다. 이루지 못하고 눈사람처럼 녹아서 사라져 버린다 해도 그 간절함이 있었기에 허무의 간극을 메꿀 수 있다. 매미가 발악하듯이 7일을 노래하고 우는 시간은 허무를 메꾸는 시간이고 충만함으로 채우는 시간이다. 인생 뭐 별것 있냐고 대충 살자고 하지만 대충 살아지지 않는다. 유한자로서의 허무를 메꿔야 하기 때문이다.

흔적 없이 사라져야 할 운명 앞에서 살아있다는 최선의 몸부림마저 없으면 레테의 강을 어떻게 건너갈 수 있겠는가. 허무의 강을 기억의 강을 절대 건너갈 수 없다.

허무의 강을 건너기 위해서 당신은 어떤 몸부림을 치는가. 혹, 나는 어떤 것이 남기고 간 흔적일까? 그것이 궁금해진다면 권대웅의 시 '화무십일홍'을 필사해도 좋다. 잠이 오지 않는 무더운 여름밤에 재즈 음악과 같이 읽어도 좋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은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아무리 막강한 권력도 십 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이다.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지고 말 꽃이지만 피어있는 동안은 영원할 것 같다. 권력 또한 마찬가지다. 영원할 것 같지만 영원하지 못한 것이 꽃이고 권력이고 인생이다.

그러나 삶이 통찰만으로 살아지는 것은 아니다. 열흘을 피었던 그 기억으로 살아가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다. 열흘 동안 붉었던, 열정을 다해 사랑했던, 그토록 간절하게 당신을 만나려고 몸부림쳤던, 만날 수도 있고 끝내 만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만나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하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 가져야 할 최선의 감각의 깨어있음이 아닐까.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를 생각하는 여름의 아침이다. 권대웅의 시 '화무십일홍'이 당신의 마음 한 켠에 나팔꽃으로 피었다가 가기를 바란다. 지나가는 바람이 그곳을 스쳐 가며 여름 더위를 잠시 식혀주길 바란다.

화무십일홍

  마당 한구석, 윤기 나고 탄력 있는 피부로 자라던 옥잠화 넓은 잎사귀 속에서 쪽진 머리에 꽂은 옥비녀 같은 꽃이 피었다. 어느 집 규수였을까. 옥잠화 몸에서 나는 향기가 너무 그윽하여 아침마다 모두머리 단장하고 있는 꽃방. 두근거리며 훔쳐보던 그녀의 흰 뒷목.
  지난겨울 담장 아래 눈사람이 서 있던 자리에 해바라기가 피어올라 물끄러미 방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다 깜짝 놀라 커튼을 쳤다. 언젠가 어디선가 본 볼이 두툼한 여자 같았다.
  아침마다 나팔꽃이 목청껏 외치는 소리들. 지나가는 바람이라도 꾀어내듯 휙휙 휘파람을 불며 허공으로 뻗어가던 넝쿨들, 낭창낭창한 것들.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없어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칠 년 만에 땅 속에서 나와 7일만 살면서 오직 사랑을 찾기 위해 울던 매미. 당신은 그토록 간절하던 당신을 만났는가.
  등줄기에 후줄근하게 땀이 흘렀다. 나도 녹아가고 있었다. 여름의 눈사람처럼 있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 백일홍을 심었는데 백일홍도 그만 져버리고 말았다.

  출근하는데 죽은 매미가 마당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 권대웅의 시집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문학동네 201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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