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2 01:23 (월)
[한지현의 '안녕 프랑스'] 버려진 기차역서 나를 찾는 문화 놀이터
[한지현의 '안녕 프랑스'] 버려진 기차역서 나를 찾는 문화 놀이터
  • 한지현
  • 승인 2024.06.12 23: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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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18구 르 아자르 뤼디크
동네 역사 담긴 기차역, 문화공간으로
한때 동네 사랑방… 시가 매입해 도시재생
'이웃을 위한' 상상 현실화 예술작품 제작
주민 자발적 참여 각종 문화축제 운영
더불어 사는 삶… 지역민 위한 제도 다양
옛 기차역의 흔적을 간직한 르 아자르 뤼디크의 외관.
옛 기차역의 흔적을 간직한 르 아자르 뤼디크의 외관.

월화수목금요일, 쉴 새 없이 일하자 어느샌가 한 주일의 끝 무렵이 다가와 있다. 그동안 나름 고되게 일한 나에게 어떤 보상을 해주면 좋을까 고민해 본다. 멋들어진 계획들을 머리 속에서 짜고 있자니 이 또한 골치 아픈 일이 돼버렸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산책을 나갔다. 양손에 지하철표 하나, 아날로그 지도 하나를 각각 들고 '낯선 산책'을 해본다. 슬슬 발걸음이 무거워질 무렵, 파리의 끝자락 18구에 도달했다.

약간 번잡스러운 느낌이 드는 길가 위에는 다양한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이웃을 위한 (Pour les voisines et voisins)'이라는 문구가 장식하고 있는 포스터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알 수 없는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어떤 '우연'을 바라고 걸었던 '낯선 산책길'에서 발견한 '우연'하고도 '낯선' 문화공간 '르 아자르 뤼디크(Le Hasard ludique)'를 발견했다.

낡은 선로 옆 펼쳐지는 축제의 현장.
낡은 선로 옆 펼쳐지는 축제의 현장.

버려진 기차역과 기찻길 위에 둥지를 튼 르 아자르 뤼디크는 '모든 이웃이 즐길 수 있는 놀이터'를 꿈꾸는 곳이다. '재미있는 우연'이라는 뜻의 그 이름이 드러내듯 온 벽에는 '우연한' 즐거움을 상상하도록 허용하는 행사 안내들이 가득하다. 르 아자르 뤼디크는 과거 역으로 사용됐던 건물 안 공연장과 식당, 카페, 그리고 기찻길을 따라 펼쳐진 300㎡ 부지의 테라스로 나뉜다.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낡은 선로 위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음악의 선율은 사람들에게 웃음꽃을 피워내게 한다. 이처럼 지역민과 더불어 가꾸는 사회문화 연대 공간을 지향하는 르 아자르 뤼디크는 한때 '문화 황무지'였던 동네를 문화의 활기가 가득한 동네로 변모시켰다.

알록달록한 벽화 그리기에 열중인 학생들.
알록달록한 벽화 그리기에 열중인 학생들.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있는 이 공간은 약 70년간 과거 파리 외곽을 둘러싼 기차 노선 프티 생튀르(Petite Ceinture)의 기차가 지나던 아베뉴 생투앙 (Avenue de Saint-Ouen) 역이었다. 지역의 자랑이었던 기차역이 문을 닫은 후에도 인근 주민들은 이곳을 사랑방으로 애용했다. 지난 1950년대에는 독립영화관 '르 뤼미에르(Le Lumiere)'로, 70년대에는 동네 중심 잡화점으로 이용되는 등 기차역의 흔적을 지닌 공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민들을 맞이했다. 그러다가 어느새 발길은 뜸해졌고, 결국 파리시가 이 건물을 매입해 지난 2017년 도시재건 사업의 일환으로 르 아자르 뤼디크 프로젝트가 채택돼 운영되기 시작했다. 세월과 더불어 적막해진 인적을 아쉬워하며 추억을 매개로 다시 한번 사람의 온기를 피워낸 것이다.

축제의 열기로 가득한 선로 위.
축제의 열기로 가득한 선로 위.

지난 7일에서 9일에는 올해로 7회를 맞이하는 '페스티벌 파브리크(Festival Fabrique)'가 열렸다. '파브리크(Fabrique)'는 '만들다'라는 뜻으로, 페스티벌 파브리크는 지역민들과 함께 꾸려나가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축제를 목표로 한다.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자원봉사로 운영되는 이 행사는 아트마켓, 보물찾기, 벽화 그리기, 보드게임, 단편영화 상영회 등 각양각색의 참여형 문화 예술 프로그램들을 선보인다. 벽화를 화려한 빛으로 물들이는 학생들, 기찻길 위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연인들, 보드게임을 즐기는 가족들 등 재생된 공간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축제를 즐기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테라스에서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하는 사람들.
테라스에서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하는 사람들.

르 아자르 뤼디크에서는 축제만 열리는 것이 아니다. 연중 내내 재즈, 힙합, 락, 하우스, 일렉트로 음악을 비롯해 연극, 즉흥극, 드랙퀸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이 공연된다. 다른 곳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인디 예술도 즐길 수 있는 특별함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밤새 이어지는 공연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만든다.

르 아자르 뤼디크는 지역민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고민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연극 수업, 요가 수업, 아이와 함께하는 가족 아틀리에 등 다양한 문화 예술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무료 법률 상담, 이주민 어학 수업, 심리 상담, 사회 문화 콘퍼런스 등 지역민의 삶에 '풍요'를 더하는 여러 행사들도 마련돼 있다. 공산품을 지양하고 지역 친환경 생산품을 우선하는 식당과 카페의 운영 정책 또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깊은 고민의 결과물이다.

건물 안에 마련된 카페 겸 식당 공간.
건물 안에 마련된 카페 겸 식당 공간.

사람은 '시간과의 경쟁'에서 언젠가는 패배한다. 다만 우리가 더불어 살았던 그 온기만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인연의 향기가 스며든 동네의 옛 추억을 머금고 있는 기차역에서 사람들은 또다시 인연을 만들고, 서로 연결된다. 재미있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는 그 마음만큼은 시간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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