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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시사(金海市史) 이대로 괜찮은가
김해시사(金海市史) 이대로 괜찮은가
  • 경남매일
  • 승인 2024.06.06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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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김해근대역사위원회 위원장, 전 영운초등학교장
이헌동 김해근대역사위원회 위원장, 전 영운초등학교장

김해시에서 편찬 발간하고자 하는 김해시사(金海市史) 14쪽에

"『일본서기』에는 529년 가야제국이 아라국에서 신라·백제와 함께 ‘임나부흥회의’를 개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부흥시키자 했던 ‘임나’란 남가라(南加羅)로 표기된 가락국이었다. 물론 가락국은 532년에 멸망하기 때문에 망하지도 않은 나라를 부흥시키겠다는 모순적 기술이지만, 가락국 10대 구해왕(仇亥王) 또는 구형왕(仇衡王)이 나라를 들어 신라에 투항했다는 기술을 보면, 최종적 병합형식을 갖춘 것에 불과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3. 가락국의 쇠퇴와 멸망'에 언급된 글인데 일본서기를 인용하여 추측으로 가야사를 이렇게 서술해도 되는 것일까? 멸망하지도 않은 나라를 부흥한다는 것이 모순이라면서 임나를 남가라로 인식하여 김해의 가락국과 연결하고 있다. 김해는 정말 남가라가 맞는가?

남가라(南加羅)는 <일본서기> 신공황후(神功皇后) 49년에 나온다. “모두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그리하여 비자발(比自?), 남가라(南加羅), 록국(?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 平定比自?·南加羅·?國·安羅·多羅·卓淳·加羅, 七國]

이 기사를 보면 신라를 깨트렸으므로 정복한 땅 7국은 신라여야 한다. 그런데도 신라가 아닌 가야를 임나로 인식하여 가야=임나 7국을 정벌하였다고 한다. <일본서기>에 의거하여 가야를 임나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비자발을 창녕, 남가라를 김해, 탁순을 대구나 창원, 록국을 경산, 안라를 함안, 다라를 합천, 가라를 고령이라고 한다.?이런 인식 즉 가야=임나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김해시사>를 편찬했음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신공 49년 기록에서 합천을 다라국으로 인식한 사람들이 가야문화 유산 유네스코 등재시 합천 옥전 고분군을 다라국으로 명시하였다가 역사를 바로잡고자 하는 바른 역사관을 가진 국민들의 거센 저항과 노력으로 바로 잡혔다. <전라도 천년사>, <부산시사>, <경남도사> 등의 논란도 모두 <일본서기> 임나관련 기사에 나오는 지명을 우리나라에 있었던 것으로 서술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임나일본부에 나오는 임나는 우리나라 가야가 맞는 것일까? 일본 서기에 임나는 200여 회 이상 나온다. 반면에 우리나라 역사기록에는 3번이 나온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이 우리나라 역사를 대부분 서술하듯이 <일본서기> 역시 일본에 있었던 임나를 서술한 것이 상식적인 판단에서 맞다. <일본서기>의 임나는 가야인들이 일본에 세웠던 소국으로 일본 기비지방(지금의 오카야마현과 히로시마현 동부)에 있었음을 조희승의 <임나일본부 해부>와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책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필자도 이와 관련된 것을 "가야사 공부·연구에 도움을 주는 책들"이란 제목으로 경남매일신문에 글을 쓴적이 있다.

[신공황후가 가지고 있던 창을 신라왕문에 세우고, 후세에 표시로 삼았다. 그 창은 지금도 신라의 왕문 앞에 세워져 있다.(일본서기는 서기 720년에 편찬되었다. 720년의 신라왕문에 이런 창이 있었다면 이 신라는 기비지역에 있었던 신라인이 세웠던 소국이다. 기비신라는 일본 기비지역의 요시이강 동쪽에 있었고, 임나는 요시이강 서쪽에 있었다는 것이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책에 나온다.)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 하사 무키무)은 즉시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 미시코치하토리칸키)를 인질로 삼아 금은채색(金銀彩色) 및 능라겸견(綾羅?絹)을 80척의 배에 실어 관군을 따라가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왕은 항상 배 80척의 조공선을 일본국에 바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 연유이다. 이에 고구려(高麗라고 기술)와 백제 두 나라 왕은 신라가 도적(圖籍)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군세를 엿보았다. 그리고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영외로 나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지금 이후부터는 길이 서번(西蕃:오랑캐)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로써 내관가(內官家)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한(三韓)이다. 황후가 신라에서 돌아왔다.]

위의 글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것으로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하고 난 뒤의 일을 적은 것이다. 이 기사가 역사사실이라면 여기에 나오는 신라와 고구려, 백제가 우리나라의 신라와 고구려, 백제가 아니라 일본에 있는 신라, 고구려, 백제인들이 세운 소국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신공 49년 기록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비현실적인 것이 많고 황당하다. 이런 서술이 <일본서기>에 많이 나오는 것은 <일본서기>가 고대 일본제국과 천황을 숭배하기 위해 역사사실과 연대를 조작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작된 역사서인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가야=임나 인식으로 쓰여진 <김해시사>의 글들을 바로잡지 않고 <김해시사>를 발간하면 역사의 죄인이 됨을 관련자들은 잊지 않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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