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5 07:30 (월)
존재로 사는 아름다움 속 궁핍
존재로 사는 아름다움 속 궁핍
  • 하영란 기자
  • 승인 2024.05.29 22:4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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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통해 삶을 묻다 22

성선경 시인 '민화 47'
물집의 핏물 적신 발바닥 지나야
황혼 혓바닥같은 허기 내려놓아
성선경 시인
성선경 시인

인간은 몸을 가진 존재다. 살아가고 있는 존재에게는 언제나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외적 상태가 어떠하든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외경한다. 하루를 살아내고 또 하루를 살아낼 때가 있다. 몸 하나를 누이고 먹고 입고 타자들과 관계를 맺고 산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살아가는 존재는 아름답다. 위대한 것을 발견하고, 높은 직위에 오르고, 인기를 얻고, 이런 것 이전에 한 존재로 산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우리가 몸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면 인생이라는 사막의 길을 걸어가며 '가시나무 잎을 먹으며' 갈 이유가 없다. 낙타처럼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가는 것이 인생이다. 가끔 인생을 달콤함으로 포장하고 싶을 때가 있다. 달콤함도 필요하다. 사막을 건너갈 때 오아시스가 필요하듯 달달한 환영의 꿀도 필요하다. 삶의 고달픔과 달달한 환영 사이를 오갈 때 성선경 시인의 시 '민화 47'을 목마를 때 목을 축이듯이 천천히 읽어보자. 벌컥벌컥 마시듯 읽어서는 안 된다.

몸을 가진 존재는 몸을 누일 공간이 필요하다. 공간은 은행에 기댄다. 은행은 증식을 좋아한다. 은행의 먹이까지 벌어서 먹여야 비로소 내 몸 하나를 모로 누일 수 있다. 벌어서 내 한 몸을 먹이기도 힘든데 은행은 그믐만 되면 배가 고프다고 한다. 고픈 배를 안고 내 밥숟가락으로 은행의 입에 떠먹여 줘야 한다. 이 일은 언제 끝나는가. '서녘'에 닿으면 내려놓을 수 있는가. 우리가 몸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질긴 허기는 끝이 나는 것인가.

먹고 마시고 자고 공간을 마련하는 이 이상의 위대한 일이 있기는 한 것인가?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문화의 이름으로, 비교의 이름으로, 경쟁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 더 고달프다. 욕망을 가진 존재는 일정 수준까지는 살아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무리수를 둔다. 무리수가 이자를 부른다. 이자는 피를 부른다. 발의 물집을 더 크게 부풀어 오르게 만든다. 먹어도 허기가 진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먹어야 하기 때문에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진다.

기본적인 것을 채우기도 힘들지만 기본에 도달하고 나도 다음 단계로 나가야 한다. 또 다음 정거장이 기다리고 있다. 일정 수준의 삶에 도달해야 하기에 '구름의 자유처럼 헛된 발자국'을 딛고 있는지도 모른다. '빛나는 내 밥숟가락'은 세상의 환영에 봉사하느라고 진작 중요한 내 입에 떠넣을 밥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선경의 시 '민화 47'은 왜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토록 질기게 허기가 지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의 허기는 언제 끝나는가 궁금하다. '물집의 핏물로 적신 발바닥을 지나'야 비로소 황혼 혓바닥같이 질긴 허기 내려놓을 수 있는가.

민화 47

낙타가
사막의 가시나무 잎을 먹으며 
온 입술이 자신의 피에 젖듯이
열흘에 아흐레는
빚에서 빚으로
오오! 빛나는 내 밥숟가락이여
구름의 자유처럼 헛된 발자국이여
이자가 이자를 낳는 그믐을 지나 
물집의 핏물로 적신 발바닥을 지나 
이제야 당도한 늦은 서녘에
거룩한 노을을 내려놓는다
황혼의 혓바닥같이
질긴 내 허기를.

-성선경의 시집 '민화(파란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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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2024-05-30 13:19:45
팍팍한 세상 살아가는데 이런 시와 글귀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입니다.
먹고 자고 입는것만 해결되도 충분히 행복한데 인간은 늘 원하는 것을 얻고나서도 더 이상을 바라게 되는 욕망을 품게되죠. 욕심을 버리고 살 수만 있다면 마음이 참 편해질텐데 쉽지 않네요. 좋은 글 잘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