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맥불변(菽麥不辨)은 춘추좌씨전 성공(成公) 하편 18년에 있었던 일의 기록에서 나오는 말이다. '콩인지 보리인지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리분별을 못하고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말이다. 시쳇말로 똥인지 된장인지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보통 통용되는 용어로는 된소리인 '쑥맥'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어릴 때 비교적 쉬운 일을 못 하거나 간단한 것도 모르면 어른들이 '이런 쑥맥을 봤나' 하면서 대신 일을 해주거나 가르쳐 줄 때 하는 소리다.
이 고사의 내력을 살펴보자. 춘추시대 진(晉)나라 여공은 대신 서동을 총애하여 그에게 조정전권을 일임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서동의 전횡으로 국정이 혼란해지자 귀족인 난서와 중항언 등이 서동을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켜 여공까지 독살했다. 그리고 양공의 증손자인 14살 주자를 왕위에 앉히니 그가 도공(悼公)이다. 몇 살 위의 형이 있었지만 서열을 무시하고 어린 주자를 왕위에 앉힌 이유는 허수아비 왕을 내세워 국정을 자기들 맘대로 농단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여러 신하가 항의하자 쿠데타 세력들은 주자의 형이 있지만 지혜가 없어 콩과 보리조차 구별하지 못해서 임금으로 세울 수 없었다고 변명한 말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숙맥불변이라고 마냥 무시했다간 낭패당할 수 있으니 사람의 겉보기로 속단할 것이 못 된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이었던 서애 유성룡에게 숙맥 같은 삼촌 한 분 있었다. 아둔하다고 형제들은 그를 일컬어 치숙(痴叔:어리석은 삼촌)이라고 놀렸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삼촌이 불현듯 서애를 찾아와 바둑 한 판을 두자고 했다. 당시 국수의 경지에 이른 유성룡은 삼촌의 청이라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대국하게 되었다. 그런데 몇 수를 두지도 않아 서애가 절절매며 귀퉁이만 살리고 완패했다. 그때 삼촌은 '한쪽 귀퉁이를 살렸으니 일어날 가능성이 있겠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는 '모월 모일 모시쯤 낯선 사람이 찾아 올 터이니 불문곡직하고 그 사람을 나의 집으로 보내라'하고 떠나니, 서애는 관복을 바꾸어 입고 삼촌의 뒤를 향해 큰 절을 하였다.
며칠 후 과연 낯선 사람이 와서 유성룡을 찾기에 그를 바로 삼촌 집으로 안내하니 삼촌은 불문곡직하고 그자를 바로 때려죽였다. 그는 바로 조선침략을 준비 중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보낸 자객이었다고 한다. 치숙으로 무시당했던 삼촌이었지만 세상을 내다보는 예지가 서애보다 한 수 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면 속과 겉이 다른 사람을 구별하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숙맥불변의 우를 범하기 쉽다.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급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격도 숙맥불변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특히 정치인의 경우 표리부동한 행동을 예사로 행하면서 자신은 숙맥불변이 아니라고 강변하기 일쑤다. 페르소나로 가장한 후안무치한 얼굴로 국민을 우롱하는 선전선동을 일삼으며 혹세무민하니 당하는 건 어리석은 민초들이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고하는 세계 석학들의 비판서가 서점가에 넘쳐난다. 엊그제 서점에 들렀더니 '자살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띄어 읽어보았다. 인구절벽으로 성장브레이커가 걸린 암울한 한국의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인구절벽은 결코 남 탓이 아닌 우리 스스로 자초한 결과이기에 책 제목을 극단적인 '자살'로 표현했다는 저자의 해명에 필자도 공감이 갔다. 역사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로 공산주의 독재가 종말을 고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쓴 '역사의 종말'은 엉터리 예측이 되고 말았다.
종말을 고했다는 전체주의 독재체제가 새롭게 발흥해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고 있다. 러시아와 루마니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영토분쟁, 동구와 중앙아시아, 남미와 아프리카 제나라의 독재 정부, 중동의 신정정치는 민주주의의 탈을 쓴 독재정권의 연장 술책일 뿐이다. 70년 장기 독재정권인 북한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자유탄압으로 핍박받는 것은 민초들이지만 숙맥불변을 악용한 독재권력 또한 파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한편 자본주의 강대국 서민들은 극심한 빈부격차로 극대극의 삶을 유지한 채 현대판 집시로 전락하고 있다.
숙맥불변의 속 깊은 뜻은 자취를 감추고 콩과 보리를 진짜 구별하지 못하는 얼치기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이 고사가 함의하고 있는 예지가 살아 숨 쉬는 세상을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 마치 내로남불의 허세로 득의만면한 가똑똑이 허풍천재의 천국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평범 속의 비범함을 지닌 리더다운 리더가 드문 세상이다. 숙맥불변의 후안무치한 자들이 기고만장할 때 촉루락시 민루락(燭漏落時民漏落)이요, 가성고처 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라는 것을 명심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