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23 21:22 (일)
이 한 잔은 시 읽는 사회를 위하여
이 한 잔은 시 읽는 사회를 위하여
  • 신정윤 기자
  • 승인 2024.05.22 22: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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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윤 사회부장
신정윤 사회부장

신경림 시인이 향년 88세로 귀천했다. 그의 시 '우리동네 느티나무들'이라는 시를 가장 좋아한다. 늙은 느티나무들이 상처를 서로 핥아 주기도 하고 열매보다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별 많은 밤을 골라 온 고을에 뿌린다는 시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그 느티나무처럼 살다 간 신경림 시인의 명복을 빈다.

신경림 시인이 미수를 넘기며 장수한 반면 동시대 시인 박인환은 30세에 요절했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는 시 구절이 유명한 '목마와 숙녀'는 교과서에도 실렸다. 왜 늙은 여류시인인지, 시에 등장하는 버지니아 울프는 어떤 여자이며 숙녀가 목마를 타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 '목마와 숙녀'가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가 좋아 자꾸만 되뇌게 된다.

일전에 내가 사는 아파트 음악회에서 이준관 시인의 '구부러진 길'이라는 시를 낭송했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이웃을 품고 가족을 품고 사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는 구절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서였다. 이야기가 있고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며 살아가는 아파트 공동체를 꿈꾸기 때문이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도 건배사로 시구절을 낭송한다. 이를테면 노천명 시인의 '별을 쳐다보며'라는 시에 '친구보다 좀 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본댓자 명예가 남보다 뛰어나 본댓자 술 한 잔만도 못 한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라는 구절을 낭송하는 식이다. 피 터지는 경쟁과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의 시대에 이 시가 나직이 전해주는 위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시를 음미하고 일상에서 읊조리는 토대를 갖춘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품격이 높아질까 생각해 본다. 경남 도내의 내빈들, 이를테면 도지사, 시장, 군수, 상의회장, 교육감, 국회의원, 지방의원 같은 깨끗한 양복 입은 사람들이 먼저 시를 인용한 축사를 하고 시를 사랑한다면 기름때 묻은 작업복 입고 일하는 노동자, 근로자, 자영업자 시민 대중들도 시를 얘기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지난달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독서율을 보면 성인 10명 가운데 6명이 1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상문학상을 시상하는 '문학사상'사가 주던 이상문학상도 다른 곳으로 넘어가게 됐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세상은 이렇지만 여전히 시를 읽는 사람들은 시집을 펼쳐 든다.

읽다 보면 시어가 가진 풍성한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가득하게 되고 평소 주마간산 식으로 넘겼던 자연의 사소한 일 하나하나가 장면이 돼 머릿속에 들어왔다.

과거 고영진 도교육감이 재직하던 당시 도내 명사들이 시 한 편씩 낭송하는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 모임이 이어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를 읽는 동네의 작은 모임이 불씨가 돼 들풀처럼 번져 횃불처럼 활활타오르길 바란다. 끝으로 조지훈 시인의 시 '사모'를 패러디해 본다. '이 한 잔은 시 읽는 사회를 위하여, 그리고 한 잔은 시 읽는 그대를 위하여, 마지막 한잔은 시를 읽으라는 초라한 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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