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길산 시인
'물잎'
세계를 대하는 태도가 인연돼
늦추고 늦추다 나중에야 거둬
모든 관계는 인연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인연이 있고 사람과 사물 사이에도 인연이 있다. 산소처럼 늘 곁에 있는 사람도 있고,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왔다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사람도 있고, 한바탕의 전쟁을 치르고 헤어지는 사람도 있다. 만남이 언제나 기쁨인 것만 아니고 인연의 끊김이 언제나 슬픈 것도 아니다.
가야 할 사람은 가야 하고 머물러야 할 사람은 곁에 있어야 한다. 짧게 만나고 아쉬운 듯이 떠나갈 때 긴 여운이 남는 만남도 있다.
한창 5월의 초록 잎이 무성하다. 어느 날 그 잎들은 천지에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잎 지고 난 뒤, 바라만 본 사람의 마음도 아쉬운데 그 잎들을 매달고 있었던 나무의 마음은 어떨까? 온몸에 잎을 매달고 있던 나무가 잎들과 이별했을 때 어떤 마음일까 궁금하다.
나와 맺고 있는 인연에 대해서 생각할 때, 동길산의 시 '물잎'이 마음으로 들어온다.
이별의 아픈 마음을 잠시 메꿔주는 인연이 있다. 그런 인연이 또 있기에 버티고 살 수 있다. 꼭 길고 긴 인연만 소중한 것은 아니다. 잠시 스친 인연이지만 평생 기억이 나는 사람도 있다. 인연의 소중함이 시간에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이별은 성찰의 시간이다. 만남이 있기에 이별이 있고, 이별이 있었기에 새로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성급한 만남, 성급한 이별, 인연에 대한 집착, 이별 후 아픔이 싫어 바로 갈아타는 환승 연애의 굴레 속에 있다면 동길산의 시 '물잎'을 낭독해 보길 권한다.
나무에 내린 빗방울이 짧은 시간 나무에 맺혀 있다가 '가장 무거워서야 뚝뚝 떨어진다', '늦추고 또 늦추다가/ 가장 나중에야 거둔다'.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만남이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을 다 붙잡으면 내 곁에 진짜 소중한 인연이 왔을 때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알겠는가. 직관이 뛰어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것이 인연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만남의 연에 이끌려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인연은 내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그 깊고 소중함이 말이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큰 슬픔에 잠긴 사람을 위로해 주고 싶을 때 그에게로 가서 '물잎'이 될 수 있을까? 잠시 '물잎'을 피워내다가 조용히 나의 역할을 다했을 때 떠나올 수 있을까.
물잎
잎 지는 나무에
빗방울이 잎 대신 맺힌다
몇 달이나 맺은 연 거의 다 내려두고
실의에 빠졌던 나무
이제 막 피는 떡잎 같은 물잎을
듬성듬성 매달고 생기가 돈다
물잎 한 잎 한 잎
또는 한 방울 한 방울
약속이나 한 듯
가장 둥글어서야 뚝뚝 떨어지고
가장 무거워서야 뚝뚝 떨어진다
오래 가지 못할 연이나마
늦추고 또 늦추다가
가장 나중에야 거둔다
한낮의 빛이 파고들어
여기 반짝이고 저기 반짝이는 물잎
실의에 빠졌던 나무가
여기 반짝이고 저기 반짝인다.
-동길산의 시집 ‘거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