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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릉비 신묘년 기사의 문맥과 문단
광개토태왕릉비 신묘년 기사의 문맥과 문단
  • 경남매일
  • 승인 2024.05.06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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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비 문맥이 헝클어진 이유는
일제, 삭제·가획·석회 변조 때문
선대 위대한 공적 기록 목적이
임나일본부 주장하려 변조
여여정사 주지·(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여여정사 주지·(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오랜 옛날 인간은 지구상의 동물 가운데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언어를 통해 소통을 원활히 하고 불과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생존의 가장 유리한 고지에 오르게 되었다. 언어의 발달과 함께 인간 생존을 도운 또 하나의 소통 방식은 문자였다.

처음엔 생존과 제사의식을 위한 단순한 표식으로 시작한 문양이 이윽고 체계를 갖춘 문자로 발전하였다. 언어는 현장에서 즉시 사용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휘발성이 강하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문자는 즉흥성이 언어에 비해선 떨어지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약없이 전달 가능하며 지속성이 좋다는 이점이 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문자체계는 더욱 정교해 졌고 전달력도 좋아졌다.

그 과정에서 문장의 흐름을 연결하는 문맥(文脈)과 글을 하나로 묶는 단위인 문단(文段)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의사소통을 위한 의미의 전달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했고 문단 또한 적당한 곳에서 끊어져야 의미의 전달이 분명해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글도 말과 같은 호흡이 있어 만약 문단이 너무 짧거나 길어지면 읽는 사람의 마음 또한 급해지거나 지루해진다. 품격있는 글은 문맥이 자연스럽고 문단의 장단도 적절히 조율되어 시대를 막론하고 동·서양에서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는 많은 명문(名文)들이 있었다.

한편 글은 돌과 나무, 천, 종이 등에 쓰였는데 돌에 새긴 글을 금석문(金石文)이라 한다. 우리의 역사를 통틀어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역사적 가치를 가진 비문(碑文)이 광개토태왕릉비에 새겨진 비문이다. 비문의 성격을 분류하면 태왕의 위대한 공적을 기록한 훈적비(勳籍碑)다. 때문에 유려한 필체를 뽐내기보다 태왕의 일생과 업적을 담백하고 정연하게 쓴 문장이다. 태왕의 일생을 시간에 따라 서술해 복잡할 필요가 전혀 없는 글이었다. 그러나 한·일 역사 갈등의 중심에 있는 논란의 신묘년 기사로 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왜냐면 갑자기 문맥이 전환되어 자연스럽지 않고 앞뒤 문장이 서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비의 재발견 후 1889년 일제의 비문 변조 사주를 받은 관변학자 요코이 다다나오의 최초 해석문은 다음과 같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 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으로서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은 변조된 것이 확실하다. 왜냐면 이러한 내용은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너무나 차이가 있는데, 문제가 되는 부분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과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 때문이다. 왜가 백제와 신라를 정복한 적이 없는데 거짓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처럼 문맥이 헝클어진 이유는 일제가 능비에 삭제와 가획뿐 아니라 석회까지 발라 변조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능비를 세운 목적은 선왕의 위대한 공적을 돌에 새겨 당대의 백성들과 미래의 후손들에게 고구려의 강대함과 태왕의 위대함을 선양하고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제가 능비를 변조한 목적은 <임나일본부>를 확정하기 위해서였다. <임나일본부>의 핵심은 첫째 야마토 왜가 한반도 남부 지역을 서기 369년부터 562년까지 200여 년간 지배했다는 것과 둘째 그 지역이 바로 김해 또는 고령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조건을 맞추기 위해 <을미년조>의 신묘년 기사에서 '二破'를 '海破'로 변조하고 '倭侵'을 삭제했다. 그래서 문장 전체의 주어를 왜로 바꾸는 역사공작을 자행했다. 또 <경자년조>에 나오는 '任那加羅'가 곧 가야라는 억측을 부리며 <임나가야설>을 만들어 냈다.

당대의 역사적 사실과도 어긋나고 문맥도 맞지 않았지만 일제는 당시의 혼란한 동북아의 국제 정세를 이용해 이러한 논리를 고착시켰다. 때문에 요코이의 첫 해석 이후 삭제된 두 글자가 '任那'라는 나가 미치오(那可通世)의 주장이 등장했다. 또 그것을 이어 이병도 박사 또한 결실된 부분이 '任那加羅'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문에서 나타나듯 '百殘□□斤羅'의 결락된 두 글자의 뒷글자 받침에 '날 斤(근)'이 남아 있는 관계로 이러한 주장은 맞지 않는다.

신묘년 기사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고 문맥이 자연스러우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되어야 한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 以辛卯年來渡 二破 百殘倭侵新羅 以爲臣民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이었으며 전부터 조공을 왔다. 그러나 왜는 신묘년부터 물을 건너 (조공을) 왔다. 두 파렴치 백잔과 왜가 신라를 침공해 신민으로 삼으려 했다."가 원래의 문장이었다. 전혀 복잡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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