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23 19:44 (일)
손 내밀어 잡은 깃털에 비친 묵직한 삶의 의미
손 내밀어 잡은 깃털에 비친 묵직한 삶의 의미
  • 하영란 기자
  • 승인 2024.05.02 22: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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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넘기기 16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
사소한 행위 쌓여 세계 만들고
말없는 친절·격려가 우리 키워
클레어 키건의 책 '이처럼 사소한 것들' 표지.
클레어 키건의 책 '이처럼 사소한 것들' 표지.

나를 키운 것은 무엇일까? 밥일까, 사랑일까, 친절일까, 바람일까, 맹목적인 교육일까?

사랑은 폭력적이어도 괜찮을까? 처음의 의도만 좋으면 그것이 사랑이 될까?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좋은 소설은 웬만한 철학서 한 권을 읽은 효과를 낸다. 추상적인 지식이나 진술이 아니라, 암시로서 사유의 유영을 하게 만든다. 내용의 줄거리를 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잔잔하게 흐르며 내는 작품의 인물들과 사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암시 속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진실을 찾아야 한다.

으레 그렇게 편하게 살던 삶을 돌아볼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 이 소설을 읽으며 부두 근처 석탄 야적장에서 일하는 주인공 빌 펄롱의 생각과 행동을 따라가 보길 권한다. 소설의 줄거리보다는 암시된 문장들에서 느껴지는 느낌들을 따라가 보는 것도 좋겠다. 소설에서 읽어보면 좋을 만한 부분이나 생각을 키우는 부분들을 발췌해서 소개한다. 직접 두세 번 읽어보길 권한다. 이 책을 누군가에게 선물로 줘도 좋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 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사람들은 침울했지만 그럭저럭 날씨를 견뎠다.'

소설의 시작 부분이다. 옮긴이 홍한별은 '소설가 존 맥가헌은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라고 말'하곤 했'다는 것을 인용한다. 소설 첫 부분의 분위기에서 암시된 것들이 뒤에서 어떤 사건이나 분위기를 가져올지 상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춰 균형을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은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 둘 다를 끌어냈다.'

미시즈 케호는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거기 일에 관해 말할 때는 조심하는 편이 좋다는 거 알지? 적을 가까이 두라고들 하지, 사나운 개를 곁에 두면 순한 개가 물지 않는다고, 잘 알겠지만" 수녀원에 관계된 일들에 엮여서 좋을 것 없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펄롱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호소하는 타자의 손을 잡는다.

다음의 발췌들을 따라가며 펄롱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 보자.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 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막달레나 세탁소는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고 아일랜드 정부에서 지원한 같은 이름과 명분의 여러 시설 가운데 하나다. '타락한 여성'들을 수용한다는 명분으로 설립했으나 성매매 여성, 임신을 한 여성, 고아, 학대 피해자, 정신이상자, 성적으로 방종하다는 평판이 있는 여성, 심지어 외모가 아름다워서 남자들을 타락시킬 위험이 있는 젊은 여성까지 마구잡이로 수용했고 교회의 묵인하에 착취했다. 동네 사람들은 세탁소의 실체에 대해 짐작하면서도 입을 다물고 높은 담 안에서 저질러지는 학대에서 눈을 돌린다.' (옮긴이의 글)

인생은 무엇으로 빛이 나는가? 내게 다가오는 것들을 외면하지 않고 손을 내밀 때가 아닐까. 이 소설은 삶을 지탱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만든다. 사소한 것들이 주는 힘, 친절과 배려, 온화한 눈길, 손잡음이 매일 먹는 밥과 같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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