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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릉비 경자년 기사의 문헌 기록
광개토태왕릉비 경자년 기사의 문헌 기록
  • 경남매일
  • 승인 2024.04.29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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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비, 일제 고토 회복 명분 변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의도적 사건 지워
삼국사기 신라본기 큰 일 암시
편찬자 의도 따라 기록 축소·변경
여여정사 주지·(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여여정사 주지·(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은 역사로부터 온다. 또한 그 정체성에 따라 한 국가의 성격과 품격이 정해진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서를 편찬할 때면 자국을 높이고 상대를 낮추기 마련이었으며 상황에 따라선 역사를 축소, 왜곡하는 경향까지 있었다. 따라서 정사(正史) 이외에 구전되는 민담과 설화는 물론 일부 전해지는 야사(野史)까지 참고해야 역사적 진실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

인간은 역사를 통해서도 생존에 대한 방어기재가 민감하게 작동하므로 후대인들은 자국 중심의 역사 서술을 어느 정도 감안하고 이해해야 한다. 고대 중국의 역사 기술 방법인 춘추필법(春秋筆法)도 그러한데 사마천의 사기 이후 중화는 높이고 주변국들을 폄하해 기록했다.

그럼 우리나라는 과연 어떠하였을까? 현재 우리에게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는 서기 1145년 고려 인종 때 문하시중인 김부식이 10명의 학자들과 함께 편찬했다. 국책 사업으로 당시 전해오는 여러 종류의 문헌을 참고하여 편찬했기에 이 기록들은 매우 신뢰할만 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자국 중심의 시각과 유교 중심 사관의 편협함으로 인해 그들에게 불리한 기록들은 일부 삭제하거나 은유적 표현으로 축소 기록했다.

한편 서기 414년에 건립된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록한 능비는 1876년 다시 발견된 후 일제에 의해 심각하게 변조됐다. 변조의 목적은 한반도를 정복하기 위해서였고 명분은 "원래의 우리 땅을 되찾는다"는 고토회복이었다. 그리고 그 고토는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와 신민으로 삼았던 백제와 신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그러한 주장이 완전한 허구임을 이전의 칼럼에서 자세히 밝혔다. 일제가 사용한 능비 변조 방법은 삭제와 가획 그리고 부분적 석회도부였다. '신묘년과 병신년 기사'의 경우 일부 글자에 획을 더하고 석회를 발라 변조했으나 '경자년 기사'는 80여 자를 대량 삭제했다. 그 까닭은 부분 변조로는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웠던 내용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고토회복을 명분으로 내세운 경자년 기사에는 '任那加羅從拔城'이 있었고 그 임나가라의 위치가 김해나 고령이며 종발성 또한 김해의 분산성이나 부산의 배산성이라는 억지 주장을 폈다. 능비의 기록을 보면 경자년에 태왕이 보병과 기명 5만을 보내 신라를 왜로부터 구원했다. 그래서 당시 신라의 왕인 내물 이사금은 가족까지 데리고 와 태왕에게 조공했다고 나온다. 경자년은 서기 400년으로 광개토태왕 재위 10년 되던 해이다. 그럼 그것이 과연 사실인지 문헌을 통해 알아보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조>를 보면 영락 9년 기해년 기사에서 영락 11년 신축년 기사로 바로 건너뛴다. 영락 10년 경자년을 아예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신라인의 후예인 경주 김씨 출신 김부식은 경자년의 역사적 사건을 고구려 역사에서 지워 버렸다.

한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서기 399년 기해년과 400년 경자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물 이사금 44년 기해년 "가을 7월 날고 있는 메뚜기떼가 들판을 뒤덮었다" 즉 왜의 창궐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45년 경자년 "가을 8월 혜성이 동방에 나타났다. 겨울 10월 왕이 늘 타고 다니던 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슬피 울었다"라고 기록한다. 고대시대 혜성의 출현은 불길함의 상징이며 왕의 애마가 무릎을 꿇고 슬피 울었다는 것은 왕 자신이나 나라에 큰일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럼 백제는 어땠을까? 경자년은 백제 아신왕 재위 9년으로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9년조>에 기록되어 있다 "봄 2월에 혜성이 규성(奎星)과 누성(婁星) 자리에 나타났다. 여름 6월 초하루 경진시에 일식이 있었다"고 나온다. 이때 백제는 '왜와 화친'(與倭和通)했지만 전쟁에 직접 참가하진 않았다. 그러나 동맹국 왜가 고구려에 의해 궤멸당한 사실을 혜성이라는 불길한 상징과 '하늘의 무기고'라는 규성 그리고 '군사를 일으킨다'는 누성을 언급해 무(武)와 관계있는 두 별을 간접화법으로 기록하고 있다.

김부식과 편찬자들은 '고구려의 신라 구원'이라는 역사적 사실 앞에 고민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진 못하고 「신라본기」와 「백제본기」를 통해 은유적 기법으로 실재한 역사를 축소했다. 이처럼 경자년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고구려군의 막강 화력으로 신라를 구원했다는 능비의 기록을 일부 축소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역사서는 이처럼 편찬자의 의도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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