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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릉비 신묘년 기사의 문헌 기록
광개토태왕릉비 신묘년 기사의 문헌 기록
  • 경남매일
  • 승인 2024.04.22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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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편수회'의 우리 역사 난도질
일제 역사 조작 기관으로 교묘히 변조
백제·신라, 신묘년 왜 전투 기록 없어
사학계 식민사학의 역사 왜곡 벗어나야
도명스님
도명스님

역사는 인간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정리한 학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남아있는 역사마저 완전한 객관성을 답보하지 못하는 승자의 기록인지라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라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패자도 불리한 입장에서 그들 나름의 역사를 남기기에 후대의 학자들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 진위를 가리곤 한다. 베일 속의 한국 고대사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난제가 있는데 바로 고구려의 광개토태왕릉비이다. 이 비는 1876년 중국 집안현에서 재발견되었다. 하지만 1889년 일제의 관변학자 요코이 다다나오의 첫 해석이 나온 이후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요코이의 해석은 문맥도 엉망인데다 태왕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 있어 우선적으로 연구하는 대상은 문헌이다. 역사의 진실을 찾기 위해 우선 남겨진 기록을 검토하고 거기에 따라 유물과 유적을 검증해 사실을 입증하는 과정을 거친다. 흔히 우리 민족을 일컬어 기록의 민족이라고 한다. 고려의 팔만대장경이나 조선의 왕조실록 그리고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우리 조상님들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하다!"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은 기록을 남기는데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 선조가 남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비록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나 매우 신뢰할 수 있는 역사서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일제가 만든 역사 조작 기관인 <조선사편수회>가 우리 역사를 난도질한 후부터 우리 역사는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 일제는 '임나일본부'를 고착하기 위해 광개토태왕릉비도 교묘히 변조시켰다.

변조의 중심에는 신묘년 기사가 나오는 영락 5년 <을미년조>와 '임나가라'가 나오는 영락 10년 <경자년조>가 있다. <을미년조>에는 문제의 '渡海破'가 있다. 요코이는 첫 해석을 다음과 같이 했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잔과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이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하지만 위의 해석은 일제가 비문을 변조한 후에 왜곡된 내용으로 해석한 것이다. 왜냐면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는 왜와 싸웠다는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신묘년(서기 391)은 진사왕 8년으로 "가을 7월에 고구려왕 담덕이 ~ 석현(石峴)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 함락시켰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태왕이 즉위한 신묘년에 백제는 고구려군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고 왜와는 아무 일이 없었다. 그럼 고구려의 기록에는 신묘년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고구려본기」 <광개토왕조>에는 "고국양왕 9년에 왕이 죽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가을 7월에 남쪽 백제로 쳐들어가 10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 겨울 10월에 백제의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라고 「백제본기」와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요코이의 해석대로라면 백제는 신묘년 왜에게 패해 신민이 되었다고 했는데 「백제본기」에서는 왜가 아니라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관미성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또 왜의 신민이 되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아신왕은 재위 2년, 3년, 4년 계속하여 단독으로 고구려와 싸울 수 있었단 말인가? 또 고구려와 맞짱 뜰 정도로 강력한 백제가 어떻게 근거와 족보도 없는 왜의 신민이 되었는지 납득이 안 된다.

한편 서기 391년인 신묘년 신라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서기 391년 신묘년 당시 신라의 왕은 내물마립간으로 재위 36년 되던 해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이사금조>에는 "34년 봄 정월에 수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는 기록 이후 바로 "37년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 왔다"는 기사로 넘어간다. 즉 신묘년인 <내물이사금 36년조>의 기록이 아예 통째로 빠져있다.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명백한 우리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주류 사학계에서는 일제의 해석을 따라 "임나는 김해다, 종발성(從拔城)은 김해의 분산(盆山) 또는 부산의 배산(盃山)이다"라는 이상한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우리 고대사는 민족 공동의 유·무형적 자산이다. 선열과 국민들이 보고 있다. 학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조상이 남긴 기록을 폄하하고 국민을 속여선 안 된다. 이제 주류 사학계는 바른 얼을 새겨 일제의 식민사학을 걷어내고 역사 왜곡의 망령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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