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시인 '꽃잎이 피고 질 때면'
구멍서 태어나 구멍 낳는 벌판서
기도·간청·겸손하고 순종해야
꽃이란 꽃은 다 피고, 잎이란 잎은 다 돋은 4월 중순의 늦봄이다. 땅속에 무엇이 있길래 이렇게 피워도 피워도 끝없이 피워낼 수 있는 것일까? 모든 구멍들은 꽃잎이든 초록잎이든 온갖 잎들을 피워내고 있다. 태양을 먹고 태양을 뿜어낸다. 땅을 먹고 땅을 뿜어낸다. 하늘을 먹고 하늘을 뿜어낸다. 거센 생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몸살을 앓는 사람들이 많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다. 식물과 비교하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것 외에는 다를 게 없다. 우리도 구멍 속에서 왔고 또 추깃물이 돼서 나중에는 식물의 잎이 될 수도 있다. 저 무수히 피고 지는 잎들은 우리보다 먼저 간 타자들이다. 먼저 간 자들이 구멍을 통해 부활하고 있다. 그러니 자연 앞에서 겸손하지 않을 수 있으랴. 우리는 앞서간 자들을 먹고 있다. 내리는 태양 빛을 먹고,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을 먹은 것들을 먹고 살아간다. 어찌 이 자연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봄이 오면 자연이 피워내는 신비로움에 감탄하기에 바빴다. 꽃놀이 가고 연초록의 성장에 흠칫 놀라면서, 자연의 주기가 돌아왔다고만 생각했다. 이 '꽃피는 봄이 오고 꽃 지는 봄이 가겠지'란 생각 속에 우리 자신의 처지를 먼저 생각하기에 바빴다. 이 시의 시적 화자는 '기도하라, 눈물로 간청하라, 순종하라'고 하고 있다. '용서를 빌지 않고서는 이 세상 넘어갈 수 없다'고까지 한다.
인간 중심의 사고를 뛰어넘어 자연의 입장, 영원의 상하에서 이 세계를 바라봤을 때 나오는 말이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은 거대한 생명이다. 아기는 이가 새싹처럼 입안에 나기 시작할 때 가려워서 아무거나 막 깨문다. 자연에도 아기의 이가 잎이 돼 돋는다. 이가 돋아서 수많은 것을 먹고, 먹은 뒤에는 다른 이를 가진 자들이 그것을 먹는다. '세상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몸 열어 새끼를 낳는다'. 우리도 그 구멍 속에서 왔고 또 돌아갈 것이다.
연초록이 이 봄날을 지배하고 있다. 모든 구멍들에서 돋은 연초록들 앞에서, 이 생명들이 '뜨거운 몸 뒤트는' 것에서 왔다는 것을 생각하자. 온 우주가 나를 낳았고 나를 먹이고 있다. 다시 나도 생명을 낳는데 협조하든지 훗날 추깃물이라도 돼 생명을 먹여 살려야 한다. 꽃잎이 피고 질 때면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꽃잎이 피고 질 때면
꽃잎 돋으면 어쩌나, 가려워 어쩌나, 봄이 왔다고 산천초목 초록 입술 쫑긋 내미는데 이제 어쩌나. 당신들의 들러붙은 무릎 사이, 당신들의 맞붙은 입술 사이, 세상의 모든 구멍이란 구멍 비집고 이파리 돋아나는데 어쩌나. 나 엎드려 기어가서 이 초록 벌판 다 짓이겨버리려네. 이 환한 초록 바다. 깊은 구명 다 메꿔버리려네. 초록 속에는 시신들이 내뱉는 추깃물, 쓰디쓴 파랑. 검은 떪음, 붉은 비린내. 입술 화한 노랑, 다 들었으니 나 이 깊은 구만리장천 연초록 구멍들 다 씹어 삼키려네. 이것들 뭉개서 온몸에 칠갑하려네. 내 두 손 두 발 다 묶어놓고 개 밥그릇에 밥 던져주던 사람들 앞에서, 내 입으로 내 구멍으로 이 풀밭 이 산천 이 넓은 초록 바다 다 짓이겨버리려네. 온몸에 깜깜한 눈 번쩍 뜨려네. 꽃이 피면 어쩌나. 온몸에 꽃피는 구멍들 가려워 어쩌나. 자장자장 그 꽃 재워줄 손길도 없는데. 세상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몸 열어 새끼를 낳는데, 뜨거운 몸 뒤트는 이 연초록 벌판 어쩌나.
기도하라하네 쉬지말고기도하라하네 눈물로간청하라하네 순종하라언제나순종하라그러네 이 세상 구멍으로 태어났으니 또다시 구멍을 낳으라 그러네 이 세상 구멍으로 태어났으니 또다시 구멍을 낳으라 그러네 (···)
-김혜순의 시집 '당신의 첫'에서(총 4연 중 1연과 2연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