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0 07:17 (화)
울면서도 기다림 포기할 수 없죠
울면서도 기다림 포기할 수 없죠
  • 하영란 기자
  • 승인 2024.04.11 0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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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통해 삶을 묻다 ⑮
김영랑 시인 '모란이 피기까지는'
기다림 있기에 버틸 수 있는 것
작은 물결 되고, 몸짓하면서
김영랑 시인
김영랑 시인

인간은 기다리는 동물이다.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보고 싶은 사람을 기다리고,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린다. 오지 않는 것을 뻔히 알고도 기다린다. 희망찬 세상을 기다린다. 가난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아픈 사람이 없는 세상을 기다린다. 소외되는 사람이 없는 따뜻한 세상을 기다린다. 기다림이 없는 삶이란 얼마나 삭막한가. 기다림이 있기에 버티는 것이다.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기다리는 것이 힘들지만 그래도 희망의 싹을 품고 있어서 힘든 순간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세상을 기다릴 때는 작은 몸짓이 필요하다. 마냥, 마음으로만 기다릴 수는 없다. 작은 물결이라도 돼야 한다. 몸짓 없는 기다림은 없다.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도 예전에는 그 아들의 밥을 아랫목 이불 속에 넣어 두었다. 아들이 금방이라도 집안으로 들어서면 밥을 먹이려고 말이다. 우리도 기다리는 뭔가를 위해서 밥 한 그릇이라도 퍼야 한다.

봄이 오면 꼭 기다리는 것이 있다. 모란이 피는 것을 보는 것이다. 다른 꽃들은 흔해서 굳이 때를 기다리지 않아도 잘 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모란은 좀 귀하다. 박물관이나 사찰, 학교 등에 주로 많이 피어있다. 딴 생각하느라 한눈 팔고 있으면 이미 모란은 지고 이 세상에 없다. 우리가 기다리는 무언가도 그렇지 않을까. 간절하게 기다리다가 먼눈을 파는 사이, 가령 욕심에 눈이 멀어서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정도를 걷지 않을 때, 와야 할 봄은 오지 않고, 피는 꽃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지나간 줄도 모르는 것이다.

모란은 꼭 몰래 피었다가 몰래 지는 꽃 같다. 한때 모란이 피는 곳을 찾아서 다닌 적이 있다. 그런데 가면 꼭 모란이 피지 않았거나 지고 없거나 둘 중 하나였다. 모란을 보기 위해 김영랑 생가를 찾아가도 시기를 맞출 수가 없었다.

모란꽃이 활짝 핀 기간이 불과 3∼4일이듯이 우리의 삶도 늘 활짝 피어 있을 수는 없다. 꽃이 아닌 나무로 있는 시간이 길다. 활짝 핀 날만 살아있는 날이 아니라 묵묵히 견디는 시간도 삶의 소중한 시간이다. 활짝 피지 않았다고 긴 날을 울 수는 없다. 시적 화자는 모란이 지고 말면 한 해가 다 간 것 같아서 하냥 섭섭해서 운다고 했다. 슬픔이 깊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한 표현이다. 울면서도 다시 모란이 필 때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당신이 하염없이 '모란이 피기까지는'처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는가? 기다리면서 무엇을 하는가?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시집 `모란이 피기까지는`(인문출판사 97년도 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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