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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시대 조상들에게 있었던 역사 사실
구석기 시대 조상들에게 있었던 역사 사실
  • 경남매일
  • 승인 2024.01.25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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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역사교육은 역사 사실을 다루어야 한다. 그래서 역사 사실을 검증하기 위해 노력한다. 실증주의 사학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대사학계는 실증사학을 한다고 하면서 구석기 시대 우리 조상들에게 있었던 역사 사실을 역사교과서에서 다루지 않는다.

이것은 이병도와 신석호의 식민사학을 이어받은 고대사학계의 실증사학은 랑케의 실증주의 사학을 변질시킨 일본 제국주의 역사학을 모체로 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실제 랑케의 역사학을 근거로 밝혀낸 것이 임종권 박사의 <한국 실증주의 사학과 식민사관> 책이다.

이 책을 안병욱이 문재인 정권의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이 되자 출판 정지했다. 이를 유은혜의 교육부가 묵인방조 했다. 식민사학 카르텔이 작동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경남매일>의 "한국 실증주의 사학과 식민사관" 칼럼을 보면 알 수 있다.

구석기 시대 우리 조상들에게 있었던 역사 사실이 '제주도 사람 발자국 화석'과 '소로리 볍씨'다. 이것은 확실한 역사 사실로 검증된 것이다.

2001년 한국교원대 김정률 교수와 진주교육대 김경수 교수가 제주도 사계리 해안가에서 사람 발자국 화석을 발견했다. 세계에서 8번째로 발견된 사람 발자국 화석으로 새와 동물의 발자국 화석과 게와 식물 화석까지 함께 발견됐다.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것으로 천연기념물 464호로 지정되었다.

제주도에서 발견된 사람 발자국 화석은 500여 점으로 2만여 년 전에 살았던 호모사피엔스의 발자국이다. 그래서 이들은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이 된다. 이들은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고 불을 다뤘으며 언어를 사용했다.

2010년 천지연 폭포 주변에서 날카로운 좀돌날이 출토됐다. 이 도구를 탄소연대 측정기로 측정하니 같은 시대였다. 제주도 사람 발자국 화석은 그 수가 사람발자국 화석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다고 한다.

2만여 년 전 제주도는 마지막 빙하기의 영향으로 한반도와 붙어 있었다. 당시 일본까지도 육지가 이어져서 걸어갈 수 있었다. 걸어서 사람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는 매머드가 있었던 제주도에 사람들이 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세한 것은 <KBS역사스페셜 – 제주도 사람 발자국 화석의 비밀>을 YouTube에서 시청하면 알 수 있다.

1998년 충북 청원 소로리 오창과학산업단지 조성을 위한 사전 발굴 중 2매의 토탄층(부패와 분해가 완전히 되지 않은 식물의 유해가 진흙과 함께 늪이나 못의 물 밑에 퇴적한 지층)에서 127톨의 볍씨와 곤충화석, 그리고 각종 식물자료가 발굴됐다.

볍씨 등이 집중적으로 출토된 토탄층의 연대를 미국 연대 측정기관인 지오크론과 서울대 가속기 질량분석 시스템(AMS) 연구실에서 볍씨 시료를 교차검증하니 1만 2890년 전~1만 4090년 전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국내 주류 사학계의 반응은 차가웠다. 1998년 문화재위원회는 볍씨가 출토된 '토탄층의 보존안'을 일축했다.

볍씨가 출토된 문화층에서 사용 흔적이 관찰되는 홈날연모가 나왔다. 이융조 교수는 "소로리 사람들이 이 홈날연모를 써서 다 익은 벼를 수확한 뒤 먹을거리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볍씨가 토탄층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소로리 볍씨는 1만 2000~1만 5000년 전 인간의 먹이얻기로 남겨진 유체로 인류가 남긴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이융조 교수는 폐교가 된 소로분교를 기념관으로 하자고 했으나 문화재청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식민사학 카르텔이 작용한 것이다.

고고학 개론서인 제4판(2006년)에 '중요한 식량과 짐승종들이 처음으로 순화된 위치'가 담긴 세계지도를 첨부하면서 '한반도 청주 부근에 쌀그림'을 표시해 뒀다. 이 책에는 '최초로 순화된 동식물과 전세계 문화발전 편년표'를 작성하면서 '벼=한국 1만 3000년 전'이라고 기록했다.

2004년 1월 16일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문화유산 관계자들이 소로리 유적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가치가 충분하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깊은 관심을 표시했다. 그러나 당시 식민사학 카르텔에 연루된 역사학자와 고고학자, 문화재청 관계자, 언론인과 정치인들에 의해 묵살됐다.

소로리 볍씨가 있었던 시절은 중국에서 걸어서 우리나라에 올 수 있었다. 당시 서해라는 바다는 없었다. 그래서 후난성의 볍씨가 소로리 볍씨보다 약 2000년 뒤지만 서로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우리 조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중요한 역사 사실이 있으면 역사교육에서 다루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왜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들의 역사 사실을 다루지 않는 것일까?

역사를 일제의 관점에서 본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역사서술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런 것인가? 식민사학 카르텔에 의한 것인가?

역사를 우리 자신이 주인이 돼서 우리의 관점에서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언제쯤 구석기 시대를 다룰 때 '제주도 사람 발자국 화석'과 '소로리 볍씨'를 교과서에 실어서 교육하는 것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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