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의 옛말은 '외'이다. 15세기 문헌에서 나타났고 현재의 '외'는 '오이'의 준말로 인정되고 있는데 본래의 어형이 '외'이고 이것이 현대에 2음절의 '오이'로 변한 것으로 추정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물외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 오이는 통일신라시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 중국에서는 관직을 가진 벼슬아치들의 벼슬의 임기(任期)가 찬 때를 과기(瓜期)라고 하는데, 이는 오이가 익을 무렵에 부임(赴任) 했다가 이듬해에 오이가 익을 때 교대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공자가 편찬한 것으로 전해지는『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장공(莊公) 8년 조에 "齊侯使連稱管至父戍葵丘, 瓜時而往, 曰及瓜而代(제후사연칭관지부수규구 과시이왕 왈급과이대)제후가 연칭과 관지보로 하여금 규구를 지키게 했는데, 그들이 오이가 나오는 때에 부임하므로, 제후가 이르기를 '내년 요맘때쯤 오이가 나오는 때에 교체해 주겠다' 했다"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본래는 벼슬의 임기가 찬 때를 말한다.
조선 순조 때 자제군관으로 동지사 일행을 배행해 북경을 다녀온 정양(晶陽) 신태희(申泰羲, 1800∼1850)의『북경록(北京錄)』[산천풍속총록(山川風俗總錄)]에 보면 '북경 통관(通官 역관)의 집에서도 우리나라의 김치 담는 법을 흉내 냈다. 도처에 간혹 갖가지 모양의 과장(瓜醬)이 있는데 맛이 그다지 좋지는 않다'라고 나온다.
그럼에도 조선 영조 때인 1740년 역관(譯官)인 이표(李杓)가 쓴 조리서 『소문사설』에 "取冬瓜黃瓜杏仁西瓜仁, 皆可浸醬爲饌, 曾食於燕京人家(취동과황과행인서과인, 계가침장위찬, 증식어연경인가) 동아와 오이와 은행과 수박씨는 모두 장에 담가 반찬을 만들 수 있는데, 일찍이 북경의 인가에서 맛보았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 말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목은집(牧隱集)』[목은시고] 제35권에 '윤가관(尹可觀)의 부인 권씨가 쌀과 오이장아찌를 보내오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한편, 목은(牧隱) 선생은 병든 노년에 여동생이 오이장아찌를 담아 보내온 것에 대해 이렇게 시를 적었다. "病裏醬瓜如蜜稀(병리장과여밀희) 병중에 오이장아찌가 꿀처럼 귀했는데 老年堂姉小相依(노년당매소상의) 노년에 당내 누이를 약간 의지한 터라 凌晨赤脚擎來送(릉신적각경래송) 새벽에 하녀를 시켜 장아찌를 보내올 제 旅舍荒?日照扉(여사황량일조비)쓸쓸한 객사에 해가 사립문을 비추누나."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인 양성지(梁誠之 1415년~1482년) 등이 쓴 『의방유취(醫方類聚)』 2권에 '학질로 인해 비장(脾臟)이 차가워진 경우에는 술지게미에 절인 잉어[鯉魚]와 술지게미에 절인 오이 장아찌[藏瓜]를 먹는다'라고 나온다.
고려 말의 학자인 이색(李穡ㆍ1328~1396)은 산문집인 목은고 '牧隱藁'에서 "병상에 있는 목은(이색의 호)에게 지인의 부인이 쌀과 함께 장과(醬瓜: 오이장아찌)를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1795년 정조(正祖)가 어머니 헌경왕후(獻敬王后) 홍씨를 모시고 원행(園幸)에 나서며 차린 음식을 정리한 책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도 장과(醬果)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