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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33 고구려의 남정(南征)과 가야 쇠락
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33 고구려의 남정(南征)과 가야 쇠락
  • 경남매일
  • 승인 2023.12.04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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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여여정사 주지·(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현재 학계에서 금관가야(금관국) 쇠락의 원인을 광개토태왕의 남정(南征)이라고 한다. 영락 10년 경자년(서기 400) 광개토태왕의 5만 병력이 왜의 근거지 임나가라를 정벌한 <고구려의 남정(南征)>을 가야 쇠락의 주요 원인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비문의 기록과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면 고구려의 남정이 금관가야 쇠락과 직접적 연관성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면 고구려의 남정이 가야 쇠락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일본의 관제 사학자들이 만든 허구의 논리로 '임나가 곧 가야'라는 <임나가야설>을 만들기 위한 역사공작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만약 고구려의 남정으로 금관가야가 타격을 입었다면 당시 재위했던 가야 5대 이시품왕(재위 346~407)의 신상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나 아무런 이상이 없다. 이를 보더라도 광개토태왕의 남정이 금관가야 쇠락의 직접적 원인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다. 학문에 있어 문헌과 고고학적 근거 없이 전제를 먼저 두고 논리를 맞추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특히 일제가 한반도를 정복하기 위해 만든 정한론과 그 도구인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는 <임나가야설> 같은 비논리가 지금도 학계의 통설이라는 점은 매우 우려스럽다. 특히 "임나일본부는 없다"라고 천명하면서 임나 7국, 임나 10국의 위치를 모두 한반도의 가야에 비정한다는 것은 학문의 일관성이 전혀 없는 망설(妄說)에 불과하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의 남정을 기점으로 정해진 금관가야(김해)의 <전기 가야연맹>과 대가야(고령)의 <후기 가야연맹>이란 명칭도 당연히 재고되어야 한다. 사실 현재 주류 사학계에서 말하는 전기와 후기 가야연맹이란 용어를 처음 주장한 이는 일본 시가 현립대학의 다나까 도시야키(田中俊明) 교수였다. 그런데 가야 쇠락에 대한 그의 주장 역시 문헌과 고고학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경자년 고구려의 남정(南征)을 주요 원인으로 전제하고 주장한 학설일 뿐이다.

그러나 5세기 이후 금관가야의 약화 원인은 경자년 이후부터 점점 강해져 간 신라의 국력과 오히려 관계가 있어 보인다. 고구려와 백제는 계속 경쟁했고, 상대적으로 신라는 그 사이에서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신라는 눌지왕(재위 417~458) 이후 점점 강해져 갔고 상대적으로 금관가야는 약해져 갔다. 그리고 약해진 금관가야가 가야의 맹주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힘의 공백을 메운 대가야와 아라가야가 가야 연맹국의 맹주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금관가야가 서기 532년 신라의 법흥왕에게 병합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명확한 기록이 없어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경자년 광개토태왕의 남정이 금관가야 쇠락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한편 광개토태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북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한 선왕과 달리 남쪽으로 영토확장을 꾀한다. 그는 집안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한강 이남 충주까지 점령해 백제와 신라를 압박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우호 관계였던 신라와도 멀어졌고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나제동맹(서기 433)을 맺기에 이른다. 이러한 복잡한 관계 속에서 그동안 중립을 유지하던 가야도 중립이 아닌 어느 편에 서야 하는 부담감이 가중되었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서기 5C 가야의 쇠락 원인은 '광개토태왕의 남정'이 아니라 '장수왕의 남정'이며, 이후 백제와 신라의 동맹으로 가야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을 것으로 유추된다.

그런데 일본 민속박물관에 재직하고 있으며 고대 일본의 인구를 연구하는 인류학의 권위자 고야마 슈조(小山修三) 박사에 의하면 죠몽 시대(선사시대~기원전 3세기)를 거쳐 야요이 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와 고분 시대(기원후 3세기~기원후 6세기), 세 번에 걸친 일본 열도의 폭발적 인구 증가는 자연 인구 증가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논문에서 밝혔다. 이러한 흥미로운 주장은 금관가야 쇠락과 연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왜냐면 그가 주장한 세 번째의 인구 증가 시기가 기원후 5세기의 금관가야 쇠락 시기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추정컨대 백제와 신라중 특히 신라와 잦은 분쟁에 염증을 느낀 금관가야의 지도부는 신세계인 일본 열도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국가적 차원에서 대규모 이주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합리적 가설이 있다 하더라도 금관가야의 쇠퇴 원인에 대해선 향후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때문에 허구의 <임나가야설>을 뒷받침하는 광개토태왕의 남정이 금관가야 쇠락의 원인이라는 학계의 확정은 재검토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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