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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 단상
만추 단상
  • 경남매일
  • 승인 2023.11.26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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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가을이 떠나는 이맘때면 폴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가 생각난다. '가을날 바이올린의 긴 흐느낌이 가슴속에 스며들어/마음 설레고 쓸쓸하여라./때를 알리는 종소리에/답답하고 가슴 아파/지나간 날의 추억에 눈물 흘리리니./그래서 나는 궂은 바람에/이곳저곳 정처 없이/흘러 다니는 낙엽 같아라.'

무척 쓸쓸하고 멜랑콜리한 만추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젊은 날의 한때 문학도의 길을 걸으며 센티멘털 저니(sentimental journey)를 꿈꾸던 시절이 떠오른다. 이제 많은 세월이 흘러 그때의 감성은 무디어졌지만 푸르른 날의 로맨티시즘(romanticism)은 아직도 가슴 한구석에 또아리를 틀고 살아 숨쉰다. 공부에 지친 심신을 리프레시(refresh)할 겸 가로변 산책에 나섰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과 검붉게 채색된 메타세쿼이아 잎새가 인도에 떨어져 수북하게 쌓여있다. 낙엽 밟는 소리가 발아래 바스락거리며 늦가을의 운치를 더해준다.

문득 구르몽의 <낙엽>이 떠오른다. '시몬, 나무 잎새 저버린 숲으로 가자/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낙엽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해 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낙엽은 날갯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가벼운 낙엽이리니/벌써 밤이 되고, 바람은 우리를 휩쓴다./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속절없이 떨어져 이리저리 바람에 쓸려가는 낙엽의 모습이 마치 우리 인생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나름대로 멋 부린다고 트렌치코트 깃을 곧추세운 채 가로수 길을 서성이며 우수에 젖어 방황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다. 가을 앓이가 유독 심했던 나는 이맘때면 어디론가 훌쩍 혼자 여행을 떠나곤 했다. 이제 나이테가 늘어나 그날의 낭만과 우수는 무뎌졌지만 마음 한구석엔

휴화산처럼 잠재해 있다. 낙엽 지는 가을의 끝자락에서 구르몽의 <낙엽>을 암송하면 인생에 대한 깊은 회한과 온갖 상념이 떠오른다. 만추에 흩날리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은 속절없이 흘려보낸 지난날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반추의 시그널이다.

계절의 오감은 자연법칙에 따른 순리이다. 우리 인생도 나이테를 더해 가면 연륜이 쌓인다. 생로병사의 순환주기는 거역할 수 없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숙명이다. 한 장 남은 캘린더를 넘겨보면서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본다. 계묘년 새해 인사를 나눌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송구영신의 연말이 가까워지니 왠지 모를 허탈감이 엄습한다.

그런대로 잘 보낸 한해였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주워 담을 결실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물론 머릿속엔 넘치도록 가득 담았지만 손에 잡히는 실체는 맹탕이다. 세속과의 공적인 연을 끊은 지도 어언 10년이 넘었다. 전공과는 무관한 동양철학에 꽂혀 역서들과 씨름하다 보니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보낸 것 같다. 파고 또 파도 끝이 보이지 않는 강호동양학(주역, 명리, 풍수, 보학)의 오묘한 세계는 시간 잡아먹는 마녀 같은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홀로 살기의 무료하기 짝이 없는 시간을 이토록 충만하게 채워준 보물단지라 생각하니 소중하기 짝이 없다. 나의 이런 선택이 외롭고 따분한 은퇴 후의 삶이 아니라, 내 인생 만연을 풍요롭게 가꿔주는 보배로운 텃밭이 된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사주팔자에 공부귀신이 씌었는지 공부는 하면 할수록 더 재미있고 뭔가 더 알고 싶은 지적욕구가 용솟음치니 운명처럼 느껴진다.

주색잡기로 음풍농월하며 시간을 허비했다면 영화<빠피용>의 주인공처럼 '시간을 낭비한 중죄인'의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앎에 대한 욕구로 독서삼매경에 푹 빠져 밤을 지새우는 즐거움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왜 내가 이 영험의 세계에 진작 입문하지 못하고 방황했는지 후회스럽기도 하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쉬고 싶으면 쉬면서, 하루의 거의 절반을 글 쓰고 책 읽는데 몰입하다 보니 잡 생각할 틈이 없다. 단지 세끼 밥 챙겨 먹는 게 귀찮을 뿐이다. 공부가 힘에 부치면 운동으로 몸을 풀고, 마음이 심란해지면 음악으로 심신의 안정을 되찾는다. 외부인과의 공ㆍ사적인 관계도 가급적 줄이고 절친 몇 명만 조우한다.

나이에 걸맞게 허심무욕 하니 무슨 고민이 있겠는가. 아들 셋은 저들 나름대로 잘 살고 있고 내 몸 건강하게 안빈낙도의 삶을 즐기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내 생명이 마름할 종점 정도는 알고 사니 여생 동안 계획한 버킷리스트만 잘 마무리하면 그런대로 괜찮은 삶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내일을 모르는 게 인생이기에 장담은 못 한다. 낙엽 지는 만추의 끝자락에서 떠나가는 계절을 아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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