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곧 전복의 계절이 돌아올 것 같다.
통영에 가면 전복마을이 있을 정도로 통영은 전복의 산지다. 그러나 통영만의 이렇다 할 전복요리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조선 중기 때부터 해 먹었던 추복탕을 추천한다.
전복은 한자어로 '복(鰒)' 또는 포(鮑)라고 부른다. 1814년(순조 14)에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 1758~1816년) 선생이 쓴 '자산어보(玆山魚譜)'에서는 복어(鰒魚), 중국 명(明)나라 때 이시진(李時珍 1518~93)이 저술한 의서(醫書)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는 '석결명(石決明)'이라 하여 눈을 밝히는 약(藥)이라 하였으며, 일명 구공라(九孔螺)라고도 쓰고 있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도 '생복(生鰒)은 일명 천리광(千里光)이니 껍질에 구멍 아홉 개 있는 것은 석결명(石決明)이라 하니 눈을 밝히는 약이요, 벽해수(碧海水)에 삶은 것은 숙복(熟鰒)이다라고 하였다.
전복 말린 것은 건복(乾鰒)이라고 한다. 건복(乾鰒)은 딱딱해서 그대로 사용할 수 없으므로 망치로 두드려서 부드럽게 한 것을 추복이라하고, 길고 가늘게 썬 것은 조복, 납작하게 펴서 말린 것은 인복(引鰒)이라고 한다.
조선 중기 대학자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1595~1671)의 '백헌집(白軒集)'에 최초로 등장한 추복탕은 조선 후기 문신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의 '명곡집(明谷集)'에 '임금께서 약천 남구만(1629-1711) 선생께 우유죽과 추복탕을 하사했다'는 내용과 함께 궁중에서는 추복을 넣어 추복탕을 끓였다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일성록(日省錄)' 정조 19년(1795년) 1월 21일 자전(慈殿), 자궁(慈宮), 내전(內殿)이 경모궁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할 때와 그 후 3번에 걸친 자궁(慈宮)께 진찬(進饌)에 추복탕이 등장한다.
과거 1759년 66살의 영조가 15살밖에 안 된 김한구(金漢耉 慶州金氏 鰲興府院君)의 딸인 어린 신부 정순왕후를 맞이한 과정을 기록한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가례의식(嘉禮儀式) 3차례 합근례의 맛보기 상차림으로 초미상(初味床)에는 추복탕 10첩(貼)이 전복자의(全鰒煮只) 3곶, 생치적(生雉炙) 2수, 산삼병(山蔘餠), 추청(追淸), 약과(藥果), 식백자(實栢子) 5합, 수정과(水正果)와 함께 올랐다.
고종 14년(1877)은 11월 3일 진찬 때 제4작은 종친의 반수 완화군 선이 진상하라는 하교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이번 진찬 때에 또 2작(爵)을 더 마련하되 제4작은 종친의 반수(班首) 완화군 선이 진상하고 제5작은 명부의 반수가 진상하며, 미수(味數)도 미마다 3기(器)로 하여 제4미는 백미자(白味子), 추복탕, 족병(足餠)으로, 제5미는 준시, 저포탕(猪胞湯), 생합회(生蛤膾)로 마련하라고 분부하라"고 하였다.
과거 1719년(숙종 45)부터 1902년(광무 6)까지 궁중에서 행하여진 4순·5순·6순·환갑·7순·8순 잔치의 내용을 기록한 '진연의궤(進宴儀軌)'(1901, 1902), '진찬의궤(進饌儀軌)'(1829, 1892), '진작의궤(進爵儀軌)'(1827, 1828)에 기록된 추복탕은 8회 잔치에 17회 정도 차려졌다.
이렇게 훌륭한 전통음식을 지금은 맛볼 수 있는 곳이 한 곳도 없다. 이 음식을 통영에서 맛볼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