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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29 바다를 건넌 고구려
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29 바다를 건넌 고구려
  • 경남매일
  • 승인 2023.11.06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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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여여정사 주지·(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의 고대 국가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아 왔다. 기록을 보면 수(隋)·당(唐)을 비롯한 중국도 중국이려니와 일본의 고대 국가인 야마토 왜(倭)의 침략은 대소 수백 회에 이른다. 그래서 일연스님도 『삼국유사』 <파사석탑조>의 마지막 부분에서 "千古의 (적인) 남쪽의 왜, 성난 고래 막고자 함일세"라는 시(詩)를 남기며 파사석탑의 영험으로 왜적을 막아주길 빌었다.

그러나 이런 성가신 왜를 진작 섬멸하지 못한 것은 이들이 잦은 침략의 경험과 항해술의 발전으로 소위 '치고 빠지는' 전술의 명수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전투에 있어선 잘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리할 때는 빨리 도망가 손실을 줄이는 것도 그에 못잖게 중요한 것이다.

영락 10년 경자년, 고구려군은 신라의 지원군이 되어 바다 건너 임나가라에 있던 왜의 근거지인 본성(本城)과 주위에 있던 변성(邊城) 신라성을 쳤고 왜는 항복하게 된다. 이같은 상황을 비추어 보면 임나가라의 위치는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고령이나 김해일 수가 없다. 왜냐면 이때 고구려와 왜의 첫 전투가 벌어진 전장(戰場)은 한반도의 신라가 분명하지만 두 번째 전투가 벌어진 임나가라의 위치는 한반도가 아니라 바다를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또 당시의 고구려는 고령의 대가야나 김해의 금관가야와는 적대국도 아니었고 상호 간 전쟁을 했다는 기록이 그 어디에도 없으므로 왜가 쫓겨온 곳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비문 <경자년조>에는 고구려가 "왜의 배후를 급히 추격했다"(倭背急追)라고 나온다. 이처럼 5만의 대군으로 왜의 뿌리를 뽑고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진 고구려군이 왜를 뒤쫓을 때 다른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다. 화급을 다투는 중요한 순간이므로 계획에 없던 중립국 가야를 공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가야는 백제나 왜의 동맹군도 아니었고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았는데 고구려가 공격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가야 또한 도망쳐 오는 왜를 잘못 받아 줬다간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고구려군이 공격했다는 임나가라의 위치는 금관가야가 될 수 없다. 만약 고구려가 공격한 임나가라가 금관가야였다면 전장은 확대되고 부담이 더욱 커졌을 것이다.

또 임나가라의 위치가 고령이라면 <신묘년조>의 "왜는 신묘년부터 바다를 건너 (조공을) 왔다"(而倭 以辛卯年來渡)는 기사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또한 고령에 왜의 본거지가 있었다는 역사적 기록이나 유물은 전무하다. 대가야는 광개토태왕의 남정(南征)과 무관하게 562년까지 존속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주장에 따라 일제는 임나의 위치를 고령에 확정하고 임나대가야국성지(任那大加耶國城址)라는 기념비까지 세운다. 이는 창씨개명(創氏改名) 못지않은 창지개명(創地改名)으로 가공의 임나일본부를 사실화하기 위한 교묘한 역사 왜곡이다.

만약 가야가 고구려의 적이었고 백제나 왜의 동맹국이었다면 능비에서처럼 임나가라라는 생소한 국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가 백제를 백잔(百殘) 또는 잔국(殘國)이라 하고 왜를 왜구(倭寇)나 왜적(倭賊)으로 비하한 것처럼 가야도 다른 어떤 이름으로 비칭(卑稱)했을 것이다. 가야라는 정식 국명을 놔두고 근거조차 확실치 않은 임나가라를 쓸 리가 만무하며, 만약 임나가라가 한반도의 가야였다면 능비의 다른 어느 곳에서라도 분명히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고, 왜가 바다 건너 쫓겨간 '임나가라'라는 지명 하나만 언급되고 있다. 때문에 한반도의 가야와 대마도 또는 열도에 위치한 임나가라는 동일한 곳이 아닌 다른 곳이다.

경자년, 왜가 혼비백산하여 도망갔다는 기사를 보면 그들이 침입해 올 때처럼 도망갈 때 역시 바닷길인 동해였다. 그 이유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이사금 38년(서기 393년)을 보면 왜가 금성을 침입했을 때 내물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깊숙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 말하고는 이내 성문을 닫았다"라는 기록처럼 왜는 육지가 아닌 배를 이용해 침략해 왔다.

이로 미루어 왜의 본거지는 바다와 관련이 있다. 때문에 7년 후인 영락 10년(서기 400년) 왜가 패주할 때 역시 동해를 통해 도망갔고 고구려의 보병과 기병도 동해에 있는 고구려와 신라의 배를 이용해 왜의 근거지인 대마도 또는 큐슈에 있던 임나가라를 쳤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의 왜는 바다를 건너 신라를 침략했다가 오히려 바다를 건너간 고구려군에게 비참하게 패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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