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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28 경자년조 신라성의 위치
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28 경자년조 신라성의 위치
  • 경남매일
  • 승인 2023.10.30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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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여여정사 주지·(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전쟁 중이다. 사실 이 참상의 시작은 팔레스타인들이 살고 있던 땅에 1948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건국하면서부터였다. 고토회복(古土回復)을 명분으로 내세운 이스라엘과 그것은 유대인의 생존을 위한 역사 왜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팔레스타인의 역사관이 첨예하게 충돌해 온 결과이기도 하다.

과거 일제는 한일합방의 명분을 야마토 왜가 서기 369년부터 562년까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었다는『일본서기』<신공 49년조>에서 찾는다. 그리고는 이를 고토회복이라 이름했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왜냐면 고토회복이란 '원래부터 본인들의 땅'이란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한반도는 옛적부터 한민족의 터전이었지 왜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가 언제 200여 년간 한반도를 점령해 살았다는 말인가. 이처럼 <신공 49년조>를 근거로 신공 왕후가 정벌했다는 신라 7국의 기록을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보는 것 자체가 완전한 넌센스다.

그리고 태왕릉비에 새겨진 기존의 변조된 <신묘년조> 기록이라 해도 고토회복이란 근거 없는 억지 주장이다. 또 필자가 합리적으로 복원한 비문을 보아도 백제와 왜가 신라를 침공했다가 지원군인 고구려군에게 철저히 패배했다는 기록뿐 그 어디에도 한반도 남부를 점령했다는 내용은 없다. "두 파렴치 백잔(백제)과 왜가 신라를 침공해 신민으로 삼으려 했다. 이에 영락 육년 병신년, 왕께서 몸소 수군을 이끌고 왜와 백잔을 토벌하였다"([二]破 百殘[倭侵]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倭殘國)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경자년조> 기사에는 "영락 십년 경자년에 보병과 기병 오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러 갔다.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까지 왜가 그 가운데 가득 찼는데 관군이 바야흐로 이르니 왜적이 물러갔다"(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南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고 했다. 하지만 이번엔 고구려군이 아예 왜적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그들의 근거지인 대마도 또는 큐슈에 있는 임나가라까지 뒤쫓아간다. "왜의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에 이르렀고, 쫓아가 성을 치니 성은 곧 항복하였다"처럼 한바탕 전투를 벌인 후에는 항복도 받아낸다. 그리고 "이에 신라인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는 신라성과 신성을 쳤으며 왜구는 크게 궤멸되었다"(安羅人戌兵 拔新羅城晨城 倭寇大潰)라는 내용처럼 고구려군은 다시 대마도나 큐슈에 있는 신라성과 신성을 쳤던 것이다.

위의 <경자년조> 비문을 보면 두 번에 걸쳐 신라성(新羅城)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신라성의 위치에 대해 사학계에서는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왜냐면 대개의 연구자들은 고구려군이 도착한 임나가라를 한반도 남부의 김해나 고령으로 잘못 인식해 신라성을 한반도 내에서만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또한 <경자년조>에 나오는 두 신라성이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첫 번째 신라성>은 남거성을 비롯한 '신라에 있는 다른 여러 성(城)'을 뜻한다. 즉 "고구려군이 남거성에서부터 시작해 이르렀던 신라의 여러 성들에는 왜가 가득 차 있었다"는 것으로 왜가 이미 신라의 여러 성을 점령해 농성하고 있다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때의 신라성이란 '성 이름'(城名)이 아니라 '신라의 성들'이란 의미이다. 즉 신라성이란 단수(單數)의 성이 아닌 '신라의 성들'이란 복수(複數)이다. 그리고 통상 자기 나라 이름을 성 이름으로는 사용하지 않는데, 예를 들면 고구려 안에 '고구려성'이 없고, 백제 안에 '백제성'이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두 번째 신라성>은 安羅人戌兵 이후에서 나오는 '拔新羅城晨城'으로 이때의 신라성은 성의 이름(城名)이다. 전 부산대 이병선 명예교수는 그의 논문 <가야사의 재구(再構)와 임나 문제>에서 "일본의 사가(史家)들과 국내 일부 사가들 중에는 금관가야가 임나가라였다고 하나, 금관가야에 신라성이 있었을 턱이 없다"라고 명쾌하게 말하고 있다. 가야가 뭐 하러 남의 국명을 자국의 성 이름으로 붙이겠냐는 말이다.

그는 음운학을 통한 지명연구로 신라성을 대마도의 사고(佐護) 또는 이즈하라(嚴原)에 있었던 성이라고 밝혔다. 그는 고구려군이 왜를 뒤쫓아 가 그들의 본거지 임나가라(대마도)에 있던 본성(本城)을 먼저 쳤고 또 그 주변에 있던 변성(邊城)인 신라성을 쳤다고 주장했다.

고대 대마도나 일본열도에는 가야인들만 건너간 것이 아니라 신라인들도 건너가 정착했고 신라와 관련한 이름들을 붙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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