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가 쓰는 말 또한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그래서 언어 전문가들은 같은 나라의 말이라도 고대어와 현대어의 차이가 심하여 고대인과 현대인이 만난다면 소통이 쉽지 않다고 말하곤 한다. 뿐만 아니라 말을 표현하는 문자 또한 많은 변형을 겪어 고금(古今)의 소통이 쉽지 않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에서 수천 년 전부터 현대까지 사용되고 있는 한자(漢字)는 비록 시간의 경과에 따라 변형은 있었지만 고대와 현대인이 만난다 해도 글자로는 소통이 가능한 매우 특이한 문자다. 그렇지만 띄어쓰기가 없고,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시제(時制)가 없는 단점도 있다. 또 명사와 형용사·동사 등의 품사가 명확하지 않아 품사를 잘못 해석하면 문장 전체가 변한다. 그래서 때로는 해석자의 주관적 입장에 따라 내용이 완전히 달라지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광개토태왕릉비 <경자년조> 기사의 '任那加羅從拔城'에서 종발성을 성(城)의 이름인 명사로 보면 전체의 뜻이 어색해진다. 대부분의 연구자는 "왜의 배후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 '종발성'에 이르니 성은 곧 항복하였다"(倭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로 풀이한다. 그러나 이렇게 풀면 당시의 상황과 맞지 않는다. 왜냐면 고구려군이 왜를 추격해 임나가라 종발성에 이르니 왜군이 싸우지 않고 그냥 항복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성은 고구려군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이다. 그런데 왜가 힘들게 자신의 근거지까지 도망가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했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려면 육지인 신라에서 하면 되었지 바다로 도망갈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렇듯 종발성은 "쫓아가(從) 성을 치니(拔城)"라는 동사로 풀어야 한다.
그동안 사학계는 종발성을 명사로 잘못 해석해 그 위치를 김해의 분산성(盆山城)이나 부산의 배산성(盃山城)으로 비정하였다. 김해 분산성을 종발성으로 보는 이유는 분산성이 마치 '작고 오목한 그릇'인 '종지'의 경상도 방언 '종발'과 발음이 같고 모양도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릇을 뜻하는 종발(鍾鉢)과 비문에 나오는 종발(從拔)은 한자부터 서로 다르다, 배산성 또한 '잔 盃'를 쓰는 것에서 기인하는데, 우리나라 산성에서는 무척 흔한 모습이다. 사실 이런 식의 지명 비정은 발음이 비슷하거나 앞 글자의 자음이 비슷하면 동일 지명으로 고정시키는 음상사(音相似)와 다름이 없다. 이는 역사 왜곡을 위해 일제의 식민사학들이 주로 썼던 비학문적인 고증방법이다. 이와 같이 종발성을 명사로 해석해도 그 의미가 맞지 않는다.
城卽歸服 다음 이어지는 기사는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이다. 광개토태왕릉비 <경자년조> 기사가 있는 2면 9행과 10행 그리고 3면 2행에 걸쳐 '安羅人戌兵'이 세 번 나온다. 이는 "신라인(羅人)으로 수자리(戌兵)하여 편안하게 하였다" 또는 "이에(安) 신라인(羅人)으로 지키게(戌兵) 했다"로 풀이된다. 이때 '戌兵'은 '술병'으로 읽지 않고 '국경을 지키는 병사' 즉 '수자리'를 뜻하는 '수병'으로 읽어야 한다. 기존 대다수 연구자들은 "안라인(安羅人)으로 국경을 지키게 했다"라고 풀이하지만 당시의 상황과 맞춰보면 무리한 해석이다.
<경자년조>에는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며 "고구려군은 왜를 추격하여 임나가라까지 갔고 거기에서 그들의 성을 함락시키고 난 후 '安羅人戌兵'하게 하였다"고 했다. 그동안 학계에선 '安羅人戌兵'을 두고 다양한 해석을 하여왔다. 이전의 주요 해석을 살펴보면 <첫 번째>는 글자 그대로 "안라인(安羅人)으로 국경을 지키게 했다"라고 해석한다. <두 번째>는 '安'을 '편안하게 하다'로, '羅'를 신라로 보아 "신라 병사로 지키게 하여 편안하게 하였다"라고 해석한다. <세 번째>는 필자의 의견으로 '安'을 '이에'라는 관계부사로 보아 "이에 신라 병사로 지키게 했다"로 해석한다.
그동안 학계는 從拔城을 "쫓아가 성을 치니"라는 동사로 풀어야 하는데 성명(城名)인 명사로 잘못 풀었다. 한편 이와 반대되는 예도 있다. 「가락국기」에는 수로왕과 허왕후가 합혼한 만전( ?殿 )의 위치를 설명할 때 '종궐서남하육십보'(從闕西南下六十步)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때 종궐(從闕)은 본궐(本闕)에 종속된 궁전인 명사로 보아야 함에도 기존에는 '궐을 따라'라고 동사로 잘못 해석하였다. 이처럼 비문을 풀이할 때, 문맥과 품사 그리고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야만 진실에 다가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