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이동의 역사다. 고대, 소수의 지도부나 집단 전체가 자연환경의 변화나 이웃 간의 물리적 충돌에 의해 다른 곳으로 옮겨가 사는 일은 꽤나 흔했다. 마찬가지로 한·일 관계에 있어 풀리지 않는 화두가 되고 있는 임나 역시 이동의 역사다. 최초의 임나로 여겨지는 대마도는 맑은 날 옛 가야 지역인 김해나 부산에서 보면 매우 잘 보인다. 공해가 없었던 고대에는 시계가 좋아 더 잘 보였을 것이다. 옛 가야인들이 원거리 항해가 가능했던 시기에 이런저런 이유로 가시거리에 있던 대마도로 옮겨가 살았다는 것은 별스러운 일도 아니다.
광개토태왕릉비 <경자년조>에 "왜의 배후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에 이르렀고, 쫓아가 성을 치니 성은 곧 귀복하였다"(倭背急追 至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서 倭背急追는 "왜의 배후를 급히 추격한다"이며, 至任那加羅는 "임나가라에 이르러"라는 뜻이다. 종발성(從拔城)은 "쫓아가(從)" "성을 치니(拔城)"로, 城卽歸服은 "성은 곧 항복하였다"로 풀이된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종발성'을 명사로 풀이하나 문맥에 맞지 않는다. 종발성은 "쫓아가 성을 치니"라는 동사로 풀어야 한다. 그 이유는 왜가 임나가라로 도망간 것은 자신들의 근거지에서 고구려와 맞서 싸우려 했고, 그들은 뒤쫓아온 고구려군과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나서 항복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至'란 '이르다'라는 도착의 의미가 있는데 '至任那加羅'에 이어 곧바로 '從拔城'이 나온다. 이렇게 보면 왜를 추격한 고구려군은 '임나가라'라는 지점에 도착한 후 다시 왜를 뒤쫓고 있다. 다만 이 앞의 부분이 8자 정도 소실되었기에 고구려군이 왜를 뒤쫓을 때의 전체과정을 잘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남아있는 글자를 해석해 보면 왜가 고구려군에 쫓겨 신라를 벗어나 바다로 도망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왜가 도망간 곳인 '임나가라'가 곧 김해나 고령의 육지라면 '쫓는다'라는 뜻의 '추(追)' 한 글자만 쓰면 되지 '도착'을 의미하는 '至'란 글자가 필요없다. 또 왜가 육지에서 쫓겨 육지로 갔다면 왜를 급히 추격한 고구려군이 임나가라에 먼저 도착(至)한 왜를 다시 쫓을(從) 필요가 없다.
정황으로 보면 왜의 도주로는 육지가 아니었다. 때문에 고구려군은 바다를 건너 도망간 왜를 급히 추격했고, 그들의 근거지인 대마도나 큐슈로 여겨지는 임나가라에 도착(至)해 다시 뒤쫓아 갔다. 위의 문장을 보면 '바다에서 급히 쫓아가 육지에 내려 다시 쫓는' 것으로 '至'와 '從'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만약 임나가 육지의 어느 곳이라면 고구려 기마병의 빠른 추격에 의해 왜는 금방 덜미를 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도주로가 육지가 아닌 바다였기에 고구려군과 왜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또 "급히 추격"이라는 의미는 도망가는 왜와 뒤쫓는 고구려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시간적·공간적으로 먼 경우에는 이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구려가 쫓아간 임나가라의 위치는 한반도에서 멀지 않은 대마도나 규슈이다.
이처럼 육지에 먼저 도착한 왜는 그들의 근거지인 성에 웅거해 방어에 들어갔다. 또 곧바로 왜의 배후를 급히 추격해 온 고구려군은 임나가라에 도착(至)하자마자 왜의 뒤를 쫓아가(從) 그들이 웅거한 성을 쳤고 왜는 항복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至)와 종(從)의 두 글자는 고구려가 육지에서 바다를 건너 다시 육지에 '이르고' 다시 왜를 '쫓아간'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설명한 문장이다.
옛 가야인들이 원거리 항해가 가능했던 시기, 가시거리에 있던 대마도와 또 거기에서 보이는 큐슈를 간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가야의 영토를 언급하며 "남쪽은 국미이다"(南而爲國尾)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임나대마도설'을 주장하는 이병선 교수는 '국미'가 대마도에 있다는 것을 지명연구를 통해 밝혀냈다. 국미는 '나라의 끝'인 한반도의 김해가 아니라 옛 대마도에 실재한 지명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김수로왕은 당대에 대마도를 이미 자기네 남쪽 영토로 편입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세력을 키운 왜가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후예인 이주민들이 처음엔 대마도를 임나라고 불렀다. 이후 이들은 큐슈까지 진출한다. 일본 고대 국가가 시작됐다는 남큐슈에는 그 흔적인 가라쿠니산(韓國岳)과 구지후루다께(龜旨峯)가 있다. 일본의 사학자들은 이곳이 일본 고대 최초의 문명이 발생한 지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 문명의 최초 전파자는 가야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