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맹(盲)자를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찾아보면 '눈에 동자가 없는 것'으로 나온다. 죽을 망(亡)과 눈목(目)으로 이루어진 합자체 회의문자인 맹(盲)은 죽은 눈이니 소경이라는 뜻이다. 이 맹자를 접미사로 붙이면 부정적인 의미의 복합명사가 된다. 문맹(文盲), 컴맹, 색맹 등 약자로 된 신조어들도 많다.
요즘 EBS교육방송에서 10부작으로 '책맹인류(冊盲人類)'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하고 있다. 컴맹이라는 말은 자주 들어도 책맹은 다소 생경하게 들린다. 책맹은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책명은 문해맹(文解盲)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일상생활이나 타인과의 대화, 강연, 방송 등에서 통용되는 일상용어를 이해하지 못해 문맹자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IT시대를 맞아 일상생활시스템이 디지털화되었다. 컴맹인 기성세대에겐 오히려 생활하기 불편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각종 대면서비스는 사람을 대신해 키오스크 시스템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그러나 신세대처럼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컴맹세대는 곤혹스럽다. 이는 PC작동의 기본도구인 툴(Tool)의 숙달보다 펜의 손맛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맹하기는 책맹이나 컴맹이나 어금버금하다.
EBS교육방송을 즐겨 시청하는 필자는 지난 8월 30일 방송에서 초등학교 5학년을 대상으로 실시한 책맹실험이 퍽 인상적이었다. 5학년 한반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어느 작가의 단편소설을 선정해 한 그룹은 책으로 읽게 하고, 한 그룹은 애니메이션 영상물로 시청하게 했다. 그리고 40분 동안 읽고 시청한 내용을 자기 생각과 상상력을 동원해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그 결과 책을 읽은 학생그룹은 도화지에 그 소설에 나오는 스토리 장면이나 사물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으로 시청한 그룹의 학생들이 묘사한 내용은 매우 빈약했다. 이는 책으로 읽은 학생들의 뇌에는 그 소설의 많은 내용들이 기억되어 저장된 반면, 애니메이션으로 시청한 학생들의 뇌에는 스쳐 지나가는 장면으로 흘려버려 잘 저장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결과는 학생들과의 질의응답으로 여실히 드러났다. 애니메이션 그룹의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잘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학습의 집중도가 독서에 비해 영상물의 이미지가 덜 각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왜 책 읽기를 좋아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읽기가 싫다. 시간 낭비하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독서할 때 문맥에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인내심의 부족으로 개으름을 피우거나 싫증을 내기 때문이다. 이는 참을성이 부족한 MZ세대의 사고방식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이처럼 독서력의 저하는 문해력(文解力)의 추락으로 나타나 신 문맹자의 양산을 초래케 했다. 문체부에서 현 대학교 2년생을 대상으로 문해력을 테스트해 본 결과 정상적인 초등학생 5학년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요즘 초중고 수업시간에 학생의 반 이상이 교사의 수업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해 졸거나 수업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옛날처럼 그런 학생에게 주의를 주거나 충고하길 꺼린다.
극성학부모들이 자기 자식 학대한다고 항의하거나, 관계기관에 신고하는 게 겁나 수수방관한다고 한다. 지금 일선교사들이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건에 분노해 교권회복을 외치며 절규하는 것은 우리 교육현장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공부는 학원의 일타강사 강의를 들어야만 좋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고, 초중고교 수업은 졸업장 따는 형식적인 과정으로 전락했다. 학부모들은 매월 비싼 학원비 수백만 원을 대느라 등골이 휘는데 일타강사의 연간 수입이 수백억에 이른다니 통탄할 일이다. 이게 바로 구제불능상태로 추락한 대한민국 공교육의 민낯이자 현주소이다.
그럼 왜 우리공교육이 이렇게 잘못됐을까. 이는 한국인의 유별난 교육열이 파생시킨 부작용이 주원인이겠지만 무엇보다도 기성세대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문체부의 국민독서실태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의 53%가 1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을 만큼 독서율 세계 최하위 국가라고 한다. 이런 부모가 애들보고 공부해라, 책 읽으라, 닦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주야장천 소맥에 통닭 먹는 시간은 있어도 마음의 양식이 되고 자식들의 공부 본보기가 되는 독서와는 담을 쌓고 산다는 게 아이러니다. 거실은 반려동물의 놀이터가 되고 변변한 책장하나 없는데, 비싸고 폼 나는 최신게임기와 전자 제품으로 가득하다. 이게 선진 한국의 전형이라니 유구무언이다.
'나는 바담 풍해도 너는 바람 풍하라'는 맹한 훈장님의 훈시처럼 백날 공부하라고 노래 불러도 독서와는 거리가 먼 책맹에게는 마이동풍이요 우의독경일 뿐이다. 책맹에서 문해맹으로 추락하고 있는 한국공교육의 문제점을 적시하는 EBS <책맹인류>를 꼭 한번 시청해 보길 권한다. 사랑하는 자녀의 미래와 본인의 가치 있는 노후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