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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22 당시 각국의 역학 구도
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22 당시 각국의 역학 구도
  • 경남매일
  • 승인 2023.09.11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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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 스님 산사정담
도명 스님 산사정담

역사는 계속 순환하는 구조를 가진다. 때문에 역사에 밝은 안목을 가진 사람은 과거를 통해서 현재의 흐름을 읽고 희망찬 미래를 열어간다. 그래서 예부터 국가를 경영하는 군왕에게 역사 공부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고 위정자의 역사에 대한 인식은 국정 분야 가운데 외교에 특히 커다란 영향을 끼쳐왔다.

광개토태왕 당시의 각국 관계를 살펴보면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두 나라는 영토확장을 위한 국지전을 계속하다가 백제의 중흥 군주 근초고왕이 고구려를 침공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다. 당시 부왕의 죽음을 목도한 두 아들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은 복수할 기회를 노렸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소수림왕 이후 고구려는 군사력을 강화해 태왕 재세 시 백제에 대한 확실한 군사적 우위를 점했다. 과거 고구려는 예전부터 백제가 자신들의 방계(傍系)라는 상대적인 우월감이 있었다. 하지만 백제는 고구려의 이러한 입장과는 다른 생각이었다. 근초고왕의 손자인 아신왕 당대의 백제가 고구려보다 약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주종관계는 아니었다. 이전에는 할아버지가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로 대등하게 경쟁했기에 백제는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렸고 이들의 앙숙 관계는 계속됐다. 이는 결국 광개토태왕 재세 시의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졌다.

<백제와 왜> 양국은 주종 내지 형제 관계로 항상 행동을 같이한다. 이유는 왜의 뿌리가 백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백제는 한반도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하지만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기에 왜와 협공해 고구려와 신라를 공격했다. 능비의 원래 글자를 복원해 보면 영락 5년 백제와 왜가 신라를 먼저 공격한다. 이유는 백제와 왜가 연합을 했다지만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기엔 쉽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나마 고구려에 순종하고 있던 신라를 먼저 합병해 후환을 없애고 세력도 키워 나중에 고구려를 공격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능비의 기록처럼 이를 감지한 고구려는 신라가 위기를 맞을 때마다 출병해 구원해 주었기 때문에 백제와 왜의 계획은 좌절되고 만다. 만약 백제와 왜가 서로 힘을 합쳐 고구려라는 거대한 나라를 꺾을 수 있다면 고구려는 백제가 차지하고 신라는 왜가 차지하는 밀약을 맺었을런지도 모른다. 그 첫 번째 계획이 신라 정벌이었는데 고구려는 막강한 군사지원으로 백제와 왜로부터 신라를 구명해 주었던 것이다.

<고구려와 신라> 두 나라의 관계는 비문에 나타난 것처럼 힘이 센 형님이 허약한 동생을 도와주는 것 같은 관계였다. 신라는 백제와 왜로부터 지속적인 침입을 받았고 늘 불안한 상태였던 것 같다. 힘이 약한 신라가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고구려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백제와 왜로부터 공격을 당할 때마다 고구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결국 영락 10년 경자년의 신라 구원에 대해 내물마립간은 가솔들을 이끌고 와서 감사함을 표하며 조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능비의 이러한 기록을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싣지 않았던 것은 신라의 나약했던 과거를 감추기 위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신라가 적의 침공을 당해 자신들이 직접 격퇴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힘을 빌어 국난을 극복했다는 사실이 매우 수치스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가야>는 능비의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지리적으로 보아도 고구려와 가야는 서로 국경을 맞닿지 않는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 있어서 고구려와 직접적인 충돌의 요소가 없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도 가야와의 기사는 한 줄도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를 보면 가야 초기인 신라 파사 이사금 대를 비롯해 양국의 지속적인 국지전은 있었다. 그러나 서기 260년 가야는 '포상팔국의 난' 때 신라의 도움을 받아 난을 진압하기도 하는 것으로 미루어, 때로는 다투기도 하다가 때론 돕기도 하는 사이로 보인다.

또 가야와 백제는 특별히 충돌했다는 문헌의 기록이 없으니 서로 무난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입장에서도 백제와 왜의 연합만으로도 신경이 쓰이는데 가야까지 적대 관계가 되면 전혀 이로울 것이 없기에 괜히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가야의 입장도 마찬가지여서 백제와 왜 그리고 신라 사이에서 처신하기도 쉽지 않은데, 막강한 고구려를 건드려서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르기에 그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의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비추어 보아 영락 10년 경자년에 태왕의 고구려군이 왜를 뒤쫓아 공격한 임나가라는 한반도 남부의 가야와 전혀 무관한 다른 어느 곳의 지역이 분명하다. 지금도 학계의 논란이 되고 있는 임나가라의 위치는 과연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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