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학계는 신묘년조의 '백제와 신라는 예전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이었다'는 비문 내용이 과장되었다는 게 정설이라 한다. 그 이유는 와세다 대학의 이성시 교수와 도쿄대학 명예교수였던 다께다 유끼오 교수의 주장처럼 백제와 신라는 결코 고구려의 속민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중국의 옛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삼국지위서동이전』 <변진조>에 "진왕(辰王)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서 대대로 이어 갔으며, 진왕이 스스로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는 기록처럼 신라의 전신인 진한이 고구려의 전신인 마한에게 예속되었던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는 신라뿐 아니라 자신들에게서 분화된 백제까지 속민이라 말할 수 있는 자긍심을 가진 나라였다. 물론 능비를 세운 이는 아들인 장수왕이며 그는 당대 고구려의 강력한 국력을 과거까지 투사해 자기들을 높이려 했을 수는 있다. 설사 그렇다고 해서 능비에 사실이 아닌 것을 기록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돌에 새겨야 한다는 한계로 인해 태왕의 업적 가운데 일정 부분 누락 되었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속민이란 의미는 태왕의 활동 당시가 아니라 백제·신라와의 과거 관계를 말한 것이므로 신묘년조는 거짓을 기록했다고 해선 안 될 것이다.
한편, 비문 전체의 기록을 보면 백제와 왜는 아주 긴밀한 관계인 반면 고구려는 예외 없이 백제와 왜에 대해 일관되게 적대시하고 있다. 고구려가 백제에 대해 적개심을 가진 이유는 태왕이 태어나기 3년 전인 서기 371년, 태왕의 조부인 고국원왕이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태왕은 어려서부터 부왕인 고국양왕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므로 백제는 할아버지를 죽인 불공대천 원수의 나라로 여겼다. 또한 백제와 연합하는 왜도 마찬가지여서 비문에서도 왜적(倭賊), 왜구(倭寇)라고 비하해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능비 신묘년조의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백제)과 신라를 파했다"라는 내용은 변조가 확실하다. 왜냐면 왜와 백제는 비문의 기록처럼 '한통속'이지 결코 서로가 적대하던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영락 5년 을미년, 백제가 왜와 연합해서 신라를 공격한 것처럼 영락 9년 기해년에서도 왜와 백제가 화통(和通)해 왜가 신라를 침범한 내용이 나온다. 또한 영락 14년 갑진년, 왜가 대방을 침범할 때도 백제와 왜는 연합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관된 백제와 왜의 우호적인 관계를 부정할 만한 아무런 이유나 문헌적 증거는 없다. 백제와 왜의 전쟁 기사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태왕이 즉위한 영락 1년 신묘년부터 영락 5년 을미년까지 백제와 왜의 관계가 나빠질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왜가 갑자기 백제를 공격했다는 능비의 뜬금없는 기록은 일제의 조작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비문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가장 강하고 뒤를 이어 백제와 왜가 있고 신라는 백제와 왜에게 계속 침공을 당한다. 그럴 때마다 신라는 강력한 고구려에게 구원을 요청해 겨우 위기를 모면하는 식이다. 특히 영락 6년 백제의 아신왕이 태왕에게 패해 "영원한 노객(신하)이 되겠습니다"라며 왜와 관계를 끊는다. 하지만 맹세를 깨고 3년 후인 영락 9년 왜와 다시 친교를 맺었다(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영락 10년 경자년 왜의 침공으로 신라의 운명은 마치 바람 앞의 등불 같았다. 왜냐면 신라의 실성 마립간이 나라를 구원해 준 고구려의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전에 없이 친히 가솔을 데리고 조공을 왔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백제와 왜의 입장에서는 만만한 게 신라였다. 반면 나약한 신라가 기댈 곳은 큰 형님처럼 든든한 고구려밖에 없었다. 고구려의 신라 구원은 영락 5년 백제와 왜가 신라를 침공해 신민으로 삼으려 했을 때, 영락 6년 대왕이 직접 출병해 막아줬고, 영락 9년 백제와 화통한 왜의 대규모 침입 때도 영락 10년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지켜주었다. 고구려가 신라를 지켜주기 위해 영락 6년처럼 대왕이 몸소 출병하거나 아니면 영락 10년처럼 5만의 대군을 보내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백제와 왜라는 껄끄러운 적을 상대하기 위해선 약한 신라지만 지켜주어 적들을 견제해야만 했다. 신라가 이뻐서라기보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역학 구도에 의한 양국의 관계였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 사회에서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 스스로가 힘을 가지지 못하면 역사에서 사라진다는 사실만이 언제나 변함없는 철칙이다.